괌 여행 1일차.

2026.01.09.

by 우율의 독서

드디어 괌이다. 삼수 끝에 괌이다. 첫 번째 시도는 코로나로 무산됐다.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모두 예약했지만 난데없이 팬데믹이 터졌다. 2020년 1월의 일이다. 두 번째 시도는 태풍으로 깨졌다. 티켓과 숙소는 물론이고 지명과 도로 이름까지 파악해두고 있었다. 출국 일주일 전에 태풍이 쓸고 지나가 현지에서 입국 금지령을 내렸다. 2023년 5월의 일이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 계획없이 무작정 떠나야 그나마 갈 수 있겠다고 식구들끼리 웃으며 말했다. 그랬던 괌을 드디어 가게 됐다. 코로나도 없었고 태풍도 없었다. 모든 게 좋았다.


동료들에게는 여행 이야기를 따로 하지 않았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캠핑 가냐는 물음에 집에서 쉴 거라는 얘기만 했다. 오후 반차를 쓰고 1시에 곧장 퇴근했다. 차를 몰고 운정중앙역으로 가서 장인어른을 기다렸다. 서울역에는 아내가 일찌감치 마중을 나가있었다. 운전석에서 조용필의 '추억 속의 재회'를 반복해서 들으며 창밖을 드문드문 내다봤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오프닝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장면은 늘 정겹고 따뜻하다. 2시 무렵 장인어른과 아내를 만났다. 경북 성주에서부터 들고 오신 곶감 박스를 내게 건내주셨다.


최종점검 시간이다. 여권과 지갑을 확인하고 폰과 캐리어와 백팩을 챙겼다. 형광등을 모두 끄고 베란다 창문을 모두 닫았다. 화단에 있는 커피나무 '원두'에게 물 한 동이 부어주고 마른 잎파리를 떼어낸 후 작별 인사를 했다. 설거지 거리와 음식물 쓰레기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짐을 챙겨 현관문을 열었다.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이번엔 정말로 갈 수 있을까? 고속도로에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불미스런 일로 인천공항이 폐쇄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돌풍이 불어 비행기가 안 뜨는 건 아니겠지?


자유로는 한산했다.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와 130번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모두 교통이 괜찮았다. 늘 막히는 김포 톨게이트 부근만 정체가 있었다. 1시간을 달려 16시 30분에 인천공항 제2터미널에 도착했다. 별 탈없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왠지 좋을 것 같다. 17시 무렵에는 동서네 식구들도 무탈하게 도착했다. 여행 며칠 전부터 마음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제발 아무도 아프지 마라, 괌에서 아무 것도 안 해도 좋으니 제발 누구도 다치지 마라, 다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제발 누구도 속상해하지 마라.


문제는 수속과정에 있었다. 여행객에 비해 발권을 돕는 항공사 직원 수가 적었다. 보안검사 직원은 더 적었다. 승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몇 안 되는 직원들이 겨우겨우 출국을 관장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의 서비스 수준과 공항 직원들의 노동 조건이 세계적으로도 우수한 편에 속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본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중간중간 새치기를 하는 얌체 승객들 때문에 직원들은 더 날카로워 보였다. 공공기관의 민영화는 없다고 하나 현실은 그들의 말처럼 그리 온전하거나 안전해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몸이 갈려가고 있을 것이다.


푸드코트 사정도 비슷했다. 밥 먹으러 온 사람들은 많은데 음식 준비하는 사람들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한식 코너가 특히 심했다. 전광판은 대기자 명단으로 꽉 찼고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은 지친 표정으로 배식대 앞을 지키고 있었다. 번호를 얼른 쳐내야하는 직원들의 표정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눈은 풀려 있었고 마스크는 겨우 귀에 걸려 있었다. 끼니를 잠깐 해결한다거나 화장실에 잠시 다녀온다거나 담배를 한 대 피운다거나 하는 막간의 여유는 사치처럼 보였다. 부디 잘 버티고 내일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279번 탑승구에 도착하니 19시 10분이다. 항공기 출발 20분 전이었다. 후다닥 화장실에 다녀오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붐비던 수속 현장과 달리 기내 안은 비교적 차분했고 빈 자리도 드문드문 보였다. 몇 시간만에 찾은 평온함이 참으로 좋았다. 가족들 표정도 모두 밝았다. 안전벨트를 착 매고 비상 시 행동요령을 다시 한번 익힌 다음 최강록 셰프의 책 <요리를 한다는 것>을 집어 들었다. 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다음 날이 '흑백요리사' 시즌2의 마지막 방송이라 가능하면 괌 도착 전까지 다 읽어야한다. 최강록 요리사가 결승에 진출했다.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다 10분 늦은 19시 40분에 이륙했다. 바람은 잔잔했고 기체도 흔들리지 않았다. <요리를 한다는 것>은 기내의 분위기처럼 차분했다. 몇몇 문장은 방송에서 보던 단단한 모습 그대로였다. "자기가 벌여둔 일은 자기가 정리하는 게 나에게 중요한 원칙이다." , "40대가 돼서는 반복적이고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 '튀는 일'은 안 하려고 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밤늦게까지 술을 먹어야지, 그러지 않았다. 그런 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21시 무렵에 책을 다 읽고 수면 안대를 착용한 다음 1시간 가량 눈을 붙였다.


이런, 오늘자 듀오링고를 안 했다. 아침에 생각났을 때 바로 할 걸, 평소처럼 자기 전에 하던 습관 때문에 결국 오늘 스페인어 공부를 놓치고 말았다. 폰은 이미 비행기 모드가 되어 인터넷이 끊긴 지 오래라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매일매일 쌓여가던 공부가 순간의 방심으로 툭 끊기니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괌에 있을 동안은 아침에 일어나 정신차리면 바로 해치워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폰을 꺼내 오늘자 여행 일정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22시 55분께 기내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객실 승무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이리저리 면세품을 홍보했다.


드디어 괌이다. 세 번 시도 끝에 드디어 괌 땅을 밟았다. 괌 현지 시각으로 00시 50분, 비행기는 안토니오 B. 원 팻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활주로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크게 성취한 느낌이다. 2019년 12월 이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꽉 닫혔었다. 아시아, 유럽, 북미 대륙이 차례차례 바이러스에 무너졌고 마침내 세계보건기구가 '펜데믹'을 선언했다. 국가 단위에서는 방역과 검역을 강화했고 개인 단위에서는 위생과 면역에 힘썼다. 굳게 닫힌 문은 천천히 열렸고 세계는 예전처럼 다시 서로 만나고 어울리며 섞여갔다. 여행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