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만,
나는 내 현재 상황을 공유했다.
그리고 마음 상태 또한 털어놨다.
맥락도 없고 두서도 없었지만,
혹여 얕은 바람에도 훅 꺼질 촛불처럼
내가 위태로워 보였는지, 모두들 덤덤했다.
호들갑도, 동정심도, 연민도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부담도 없고.
역시 잠정조치가 내려졌다고 해서
곧바로 안심되는 건 아니었다.
머리는 이해했지만,
몸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마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릴 때마다.
혹여 밖으로 집의 불빛이 새어나갈까 봐.
나는 매 순간 노심초사 전전긍긍했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키지는 못했다.
트라우마는 법의 보호가 시작되었다는
알량한 이유로 사라지지 않았다.
모친은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통제 아래에 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았고,
어디선가 갑자기 이름을 부를 것 같았다.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열면
그 앞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딸~!"이라고 할 모친이 서 있을 것 같았다.
문을 여는 순간들이
이미 선을 넘은 사람이
선을 지켜줄 거라고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아니, 진작에 선이라는 게 있었나.
없었지.
없었으니까.
이 지경까지 왔지.
스토킹 범죄 피해자들은 나보다 더 하겠지.
더 무섭고, 더 공포스럽고, 더 괴롭겠지.
다들 어떻게 버티는 거지?
정작 가해 당사자는 본능에 따르면 되는데,
피해 당사자는 온갖 감정과 논리, 상념에 빠져야한다니.
정말, 여러가지로 불공평하다.
그 사람이 선이 없다고 해서,
나도 선이 없어선 안 됐다.
선을 긋고, 또 긋고, 계속 그었다.
그냥 지금은 독약을 곁들인 선을 긋는 중일 뿐이었다.
선에 독을 탄 이상, 나도 달라져야했다.
그 독을 나도 독기라는 이름으로 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혼자 버티지 않기로 했다.
불안이 찾아들면, 갑갑해서 숨이 막혀오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 것 같은 조짐이 오면.
막연하게 내 등 뒤로 칼이 꽂힐 것 같은 기분이 들면,
그 순간 가장 여유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연락했다.
“지금 좀 불안해.”
그 한 문장만 보내도
전화가 걸려왔고, 메시지가 왔다.
그들은 나를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의 불안을 그대로 두고
같이 앉아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늘 그런 식으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었다.
조언하지 않고,
해결하려 들지 않고,
다만 감정을 밀어내지 않는 사람.
어쩌면 나는
내게 가장 필요했던 방식으로
이미 누군가의 곁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지금
내 곁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내게 구원받아야 할 만큼
부서진 사람들도 아니었고,
나 없이는 서 있지 못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자기 나약함을 인정할 줄 알고,
자기 몫의 무게를 알고,
그럼에도 타인의 무게를
조심스럽게 대할 줄 아는 사람들.
나는 그 옆에서 조금씩 다른
‘강함’을 배우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힘든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아무도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건
나만의 비극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실이었다.
나 역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무게를 들고
같은 공간에 잠시 머무를 뿐이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편하게 했다.
큰 사건은 없었다.
해결책도 없었다.
그저 내 불안을 기꺼이 들어주는 친구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필요하면 언제든 달려와 줄 나의 남자친구.
그리고 존재만으로도 나를 살게하는
내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게 만드는 강아지들과 고양이.
그 존재들이 내 하루가
끊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산책을 나가는 순간,
출근하는 순간,
퇴근하는 순간.
아니,
집 안에 있으면서도
집 밖으로 새어 나가는 빛이 두려웠다.
이미 정상 범주를 벗어난 사람이
잠정조치를 지킬 거라는 기대는 내게 없었다.
내 의지를 존중할 거라는 믿음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래서 이 불안은 막연하지 않았고,
지독하게 구체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을 버텼다.
완전히 안전해져서가 아니라, 기대도 되는 곳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하나의 생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내 안전지대는
어떤 장소도, 어떤 사람도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
내가 불안정하면 어디에도 머물 수 없고,
그 누구도 나를 대신 안정시켜 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저 하루를 살았다.
버티지 않고, 그냥 살았다.
겁이 나도 출근했고,
무서워도 퇴근했다.
안도의 순간은 현관문을 잠근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정도였다.
그렇게 매일이 흘러갔다.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지만,
예전만큼 끔찍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버틸 수 있겠다 생각하던 어느 날,
회사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약간의 안도감을 완전히 박살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