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지 않은 침입, 위반은 아니었다.

12화.

by 김우연


일요일 저녁, 이어질 한 주를 준비하던 때였다.

드물게 직장 동료로부터 카톡이 왔다.


"너를 찾는 전화가 왔다."


직장 동료와 나는 개인 휴대폰으로

회사 직통 연락처가 연결되어 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은 게 다행이었을까.


일요일 낮에 근무를 할 리가 없는 회사로

나를 찾는 전화라니, 뻔했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녹음파일을 전달받았다.


파일명에는 발신자의 연락처가 기재되어 있었다.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모친의 연락처였다.




통화 녹음을 받았을 때,
나는 한동안 파일을 열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전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건드렸는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얼굴을 인터폰 화면 너머로 보는 것도,

음성메시지로 녹음된 목소리를 듣는 것도

내 몸은 늘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


이걸 듣고 나서, 내가 얼마나 망가질 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들어야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하지 않겠다고,

이미 마음 먹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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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버튼을 누르자
매일 듣는 동료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그리고 곧바로,
너무 익숙해서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모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안녕하세요. 죄송한데요.

거기 A 회사가 맞습니까?”


정중했고, 아무 문제도 없는 말투였다.


“예, 맞습니다.”


“아, 제가 쉬는 날이라서요.
혹시 예전에 사무 보던 아가씨
지금도 다니고 있나요?”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안부가 아니라 탐색이라는 걸.


“말씀하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XXX이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내 이름.


모친은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 있는 사람을 왜 찾는지 설명 하지 않았다.


직장 동료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같이 일하던 거래처 담당자가

나를 찾는다고 생각하고 응대를 했다고 한다.


그래, 나의 사정을 모르는데.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동료도 상대가

뭔가 이상하다고 직감했단다.


“그만뒀습니다.”


동료의 말에 잠깐의 정적이 몰아쳤다.


“아… 지금은 안 다니는군요.”


놀라지도 않았다.
이미 예상한 대답처럼,
다음 질문이 바로 이어졌다.


“언제쯤 그만뒀습니까?”

“좀 오래됐습니다.”

“사고로요? 아니면 그냥 퇴직인가요?”


사고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숨이 멎었다.


분명 모친은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왜 그만 뒀었는지, 언제 그만 뒀는지.

그때도 다른 지역으로 옮긴 나를 쫓아와

공간을 침범하고, 시녀처럼 이것저것 부렸다.


그런데 사고라니?

이렇게까지 모른 척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서늘했다.


잘 모르겠다는 직장 동료의 말에

모친은 질문을 바꿨다.


“그 아가씨가 아직 같은 업종에 일을 하고 있나요?”


미치겠다. 정말 미치겠다.

돌아버리고, 숨이 막히고.


통화는 단 2분 30초였지만,

나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회사 대표자의 이름을 묻고.

거래처 대표자를 묻고.

회사의 위치를 묻고.


계속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직장 동료를 떠봤다.


그쯤 되니 확신이 들었다.

또, 찾아갔구나.


회사는 얼마 전 이전했다.

그곳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건물이라,

분명 늘 그랬던 것처럼 찾아갔으리라.


모친은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다녔던 곳에 다시 다니고 있으리라는 걸.


“혹시…그 아가씨 지금 어디 있는지나
연락처 같은 건 모르시겠죠?”


동료는 모른다고 답했다.


모친은 아무 답도 얻지 못한 채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모친은 끝까지 공손했고,

끝까지 침범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교양 있고 걱정 많은 엄마.

딸을 아끼는 보호자.


민낯은 언제나 나에게만 드러났다.

모친은 언제나 나에게만 드러내던 민낯을

다른 사람은 절대 모르도록 최선을 다했다.


다시금 그 모습을 듣고 있자니,

너무 불쾌해졌다.





녹음이 끝났을 때,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분명한 도발이었다.

내가 다시 반응하기를 바라는 시험.


직접 연락하지 않았고,
접근하지 않았고, 위협도 없었다.

잠정조치를 단 하나도 위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느꼈다.

이건 접촉이 아니라, 침입이었다.


법은 몸의 거리를 잰다.

몇 미터, 몇 번,
어떤 수단.


하지만 심리는 거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직접 오지 않아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내 생활 반경을 훑는 것만으로도
공포는 충분히 시작된다.




법은 나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그날 나는 알게 됐다.

이 싸움은 문을 잠그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상대를 막는 싸움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싸움이라는 걸.


그리고 그 싸움은
아직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도.




예전과 나는 분명히 달라졌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다음날, 곧장 처음 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일단은 메세지를 남겼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경찰은 답이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바로 여청계로 전화를 걸었다.

새로운 경찰 담당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추가 신고 접수를 요청했다.


"아, 근데 이건 추가 신고를 하기엔 애매하네요.

잠정조치 위반은 아닙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이런 건 위반이 아니라니.

법의 선이라는 건 대체 뭘까?


이젠 다 틀렸다.

법은 날 지킬 수 없다.


어떤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너머의 담당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선 경찰서에 와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자고 했다.


알겠다고 전화를 끊자마자,

눈가에 눈물이 끓었다.


회사라서 감기 기운이 있는 사람마냥 굴며

훌쩍임을 감추고, 안약을 넣어 눈물을 가렸다.


내 인생의 종말을 선언 받은 기분이었다.

결국 혈연이라는 관계, 모녀 관계라는 건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죽고싶었다.

다시금,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이 쇠사슬이 풀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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