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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 Oct 10. 2024

보여주고 싶은 삶

SNS에는 절망이 없다.

SNS. 'Social Network Service(또는 Social Networking Service)'의 약자이다. 싸이월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X(트위터), 스레드... 30대라면 이 중 최소 하나 이상은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싸이월드 > 페이스북을 지나 현재는 인스타그램 하나만 하고 있는데, 그 마저도 남기고 싶은 기록만 올리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보며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은, 절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값비싼 선물을 자랑한다. 나조차도 남기고 싶은 기록은 행복했던 기억이기에 내 피드에도 절망은 없다. 보고 있으면 행복하지만, 어딘가 씁쓸해진다.


매스컴에서는 흔히 청년세대를 절망과 포기로 표현하곤 한다.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로 인해 오는 우울감과 좌절감, 혐오 등과 같은 감정들이 일상이 돼 버린 만큼 이 감정들은 늘 문제로 나타난다. 그런데 정작 청년세대가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SNS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 언제나 밝고 희망차며 화려하다.


수많은 청년들이 끊임없이 여행을 한다. 동남아, 유럽, 미국, 아프리카 등 '여기가 어디야?' 하는 공간조차 해시태그를 검색해 보면 그곳에서 웃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모습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마찬가지로 핫플레이스라 불리는 각종 식당과 카페, 팝업스토어에서도 주 소비층은 청년들이다.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는 것이 당연시되면서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흥행 중인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들의 식당 대기가 3만 명이 넘어 1년 뒤에나 방문할 수 있다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한 끼 식사와 커피 한잔으로 몇 만 원씩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처럼 보인다.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수십만 원에 달하는 호캉스는 분기별로 가줘야 한다. 신혼집은 반드시 30평 대 아파트에서 시작해야 하며, 프러포즈에는 다이아몬드와 샤넬백이 빠질 수 없다. 친구들이 브라이덜 샤워를 해줘야 하고, 젠더리빌 파티도 해야 한다. 만삭의 어미라면 내 아이를 위한 베이비샤워도 해야 한다. 할 게 너무 많다. 한 달 월급이 얼마일까? 돈은 얼마나 모았을까? 머리에는 물음표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여러 사람들의 게시글을 보고 있으면 현실 감각을 묘하게 잃어버린다. 나만 이렇게 사는 건가? 나도 모르게 비교하게 되며 어딘가 비참해지기도 한다. 누군가는 내 피드 속 삶을 부러워할까? 내가 속해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인지부조화가 생겨버린다. 삶이 밝고 화려하게 채색된 이미지들로 치환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삶이 호텔식 인테리어로 꾸며진 인테리어의 순간,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순간, 군살 없는 몸매로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플로팅 조식을 먹는 순간, 예쁘게 잘 차려진 브런치를 먹으며 햇빛을 맞는 순으로만 구성되는 듯한 착각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SNS 이미지의 90% 이상은 연출된 단 한순간의 이미지라는 것을. 결코 그것이 매일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잠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살고, 모든 시대는 그때의 방식으로 삶을 빼앗긴다. 이 시대에서는 삶을 빼앗기는 수단이 '이미지'다. 이미지를 보고, 이미지를 좇으며, 현실을 잊어버린다. 이미지를 위해 돈과 시간을 바치느라 삶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론 이 가운데 경험을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경험조차 돈과 시간이 필요하다.


청년세대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다만 보이는 것에 조금 더 민감한 청년세대가 자극을 받을 뿐이다. 4050보다 자본과 권력이 없어 그저 소리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청년세대. 보여지는 이미지와 실제 내 삶의 간극을 가장 거대하게 느끼고 있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 여러 시도들을 하겠지만, 일하는 개미와 건물주 베짱이처럼 그 간극은 점점 벌어질 것이다.


혀 끝이 씁쓸하다. 어떻게 해야 이 간극을 좁힐 수 있을까. 잘 살아보고 싶었지만 그저 살아내기 급급했던 청년세대를 살짝 지나온 지금. 무언가를 다시 시작해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애매한 나이. 진짜 내 삶을 보여줄 수 있도록 그 간극을 좁혀갈 것이다. 그게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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