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편승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가?
한 불쌍한 늙은이가 있다. 근대화 시기를 살아낸 늙은이, 안초시이다. 그는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서 딸에게 버려진다. 땅 투기의 한 탕을 노린 어리석은 자이다. 하지만 안초시가 그런 선택을 하도록 내몬 이는 그의 딸 안경화이다. 안경화는 근대화에 완벽하게 적응한 인물이다. 가족의 사랑도 돈 앞에 서면 짓밟는 모습을 보여준다. 안초시는 시대에 뒤떨어진 노인으로서 목을 맨다. 나는 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왜 시대에 도태되는 사람이 발생하는지, 왜 사람들은 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지 말이다. 끝내 한 질문으로 도달했다. 시대에 편승하는 것이 언제나 옳은가?
한 알파 계급의 남자가 있다. 2540년을 사는 사람이다. 버나드는 뛰어난 두뇌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부여되었다. “비능률이란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서는 ‘성령’에 대한 죄악이다.”라고 외치는 ‘멋진 신세계’에서는 모두가 하루하루 순응하며 살아간다. 불만이 나타나면 바로 마약인 소마를 제공한다. 물론 이 세계에도 반항아는 있다. 야만인 구역에서 온 존이 그러했다. 그러나 존의 최후는 안초시와 똑같다. 세상을 뒤집기 위해 소마를 던지며 호소했으나 자신이 세상을 등졌다. 올더스 헉슬리는 문명사회를 매우 비판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올더스 헉슬리가 그린 멋진 신세계가 머지않았다. 근대에는 산업화가, 현대에는 정보화가 순식간에 사회를 변화시킨다. 강산이 한 번 면하기도 전에 도시가 세워지는 사회다. 휴대폰의 탄생부터 생성형 AI까지 불과 20년도 채 안되었다. 20년 안 되는 시간 동안 커뮤니티와 댓글에서 서로 욕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도덕에 경계심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평범한 장교가 있다. 실제로 나치 시대를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충실한 삶을 살아가던 군인, 아이히만이었다. 유대인 학살 명령에까지 충실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은 재판까지 받게 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며 항변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보고 ‘악의 평범성’을 짚어냈다. <사유함과 도덕, ‘악의 평범성’을 중심으로>에서 한길석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일정한 조건만 갖춘다면 평범한 사람도 얼마든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일정한 조건이 시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휩쓸리다 보면 너무 쉽게 악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심지어 누구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 의견이 도덕적으로 옳든, 옳지 않든 말이다. 우리는 시대가 쥐어준 기술의 산물을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보장해 주는 SNS와 댓글을 도덕적을 사용해야 한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생각하며 사용해야 한다.
나는 SNS를 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 낭비 같았고 의미 없어 보였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까지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의 대화를 놓치는 경우가 즐비했다. 이해가 안 되더라도 넘어가면 되지만 소외감은 넘어가기 힘든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안초시가 되어가는 모양이었고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계정을 만들어 보았다. 참 멋진 신세계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몇 시간이고 작은 화면에 갇혀있었다. 평소에 즐겨 읽던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최근에야 그 심각성을 알았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펼쳤는데 글이 안 읽혔다. 정확히 휴대폰 가로길이만큼 문장이 잘려서 읽혔다. 그러니까 전체 문장을 눈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제야 21세기가 선물한 어마어마한 발전의 산물인 휴대폰이 의도치 않게 인간 역사와 지성의 상징인 책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들 유행에 따라가려면 SNS를 하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유행은커녕 내 삶의 취미를 따라가기 벅차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친구에게 ‘문찐(문화 찐따)’라며 놀리고 있었다. 내가 가장 혐오하던 인간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충격은 대단했다.
“현대적 악의 특징이다. 그 의미는 생각 없음의 피상성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이 말을 덧붙였다. 흔히들 생각이 과하면 병이 난다고 한다. 생각 좀 비우고 되는대로 살아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내가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왜 하고 있는지 자각해야 한다. 때로는 걱정도, 자책도, 후회도, 의심도 필요하다. 생각해야 한다. 너무도 쉽게 서로에게 다가설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비워진 머리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므로. 또 받기도 하므로. 우리는 복덕방의 안초시도, 안경화도, 멋진 신세계의 버나드도, 존도, 하물며 아이히만도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대를 끝없이 의문하고 인식하여 그렇게 선택하는 것. 그렇게 시대의 도덕과 정의의 조류에 몸을 맡기지 말고 헤엄쳐서 그 근본이 무엇인지 나만의 기준을 세우는 것. 시대가 선물한 발전의 안락함에 안주해 질문을 멈추지 말 것. 그렇게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것이 글의 시작에 대한 답변이다.
<복덕방> , 이태준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