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보고는 나도 처음이었다.
첫 경영진 보고가 잡혔다. 우리의 사업 방향성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우리가 사업을 빌딩 하는 1여 년의 기간 중에는 총 4번의 보고가 플랜으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대망의 첫 보고였다. 첫 보고의 명칭은 '사업 방향성 보고'였다. 우리의 미래의 투자자이자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보스몹들에게 첫 선을 보이는 자리다.(상당히 중요하다는 말..)
준비하려 문득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나도 경영진에게 보고할 자료를 메인으로 맡아 진행해본 적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 좀 채워줘 라던지, 어디에 쓰이는지도 잘 알려주지 않은 채 이것저것 시켜주시면 해내기 바쁘던 시절에 어떻게 가공돼서 도움이 되는 자료로 쓰였을진 몰라도 내가 총대 메고 기획하고 작성하는 경험은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고민이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태 5년간 울고 웃으며 배웠던 일들에 기획성 업무가 많았어서 이런 방향성 보고에 대해서 대략적인 논리 구조나 플로우 정도는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던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늘 그렇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실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치다. 떠오른다고 내가 그것을 실행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오만함이라고 말해주고 싶다(실제로 나도 소싯적엔 오만함의 끝판왕이었다..)
더 다양한 형태의 회사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기업에만 다녀봐서 그런지 몰라도, 보고서를 준비한다고 하면 가끔 '이게 뭐하는 짓일까?'싶을 만큼 디테일들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 어릴 적엔 또,, 워드나 피피티를 수정하다 보면 정렬이나 형식이나 뭐가 이렇게 내 생각대로 내 맘처럼 안 움직여지는 게 많았는지,, 그걸 한땀한땀 옮기고 왜 안 맞을까 하면서 클릭질을 하고 있노라면,, 회사란 보고 경진대회가 아닐까 싶었다
본사의 요청은 회사의 전형적인 보고 형식을 탈피해서 '진짜 벤처 자료 같았으면 좋겠다'였다. 그러면서 덧붙여 표지나 폰트마저도 회사 내규나 형식이 아닌 그마저도 새로웠으면 한다고 했다. 사실 우리도 대기업 회사원밖에 안 해봐서 그런 자료가 무엇인지 감이 딱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첨부해주셨던 그 유명한 전설의 에어비앤비(airbnb) IR Deck을 보면서'아 이렇게 하라는 거구나'하면서 왜 이 자료가 IR DECK의 바이블로 삼아지는지 깨달을 수 있었으며,, 진심으로 나는 감탄했다.
일단.. 여태 회사에서 주로 보던 전략 자료(?)라고 일컫어지는 자료와 다르게 여백이 많았다(박수..) 내가 감탄했던 포인트는 장표당 몇 줄 안 되는 간단하고 명료해 보이는 자료 속에 그 글들만으로도 오히려 말하고자 하는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을 전부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고수의 영역이다.. 이미 머릿속으로 한바탕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리해야만 나올 수 있는 액기스 같은 거라고나 할까, 여태 회사에서 흔히 보던 어지럽게 전년대비 목표 달성률이 어떻다는 둥, 내년도 계획과 전망은 어때서 우리는 이런 전략으로 이렇게 해보겠다는 둥 하는 자료들과는 전혀 달랐다.
전공을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죽어도 싫던 물리화학이나 생화학책마냥 알 수 없는 어려운 용어들을 남발하며 두껍고 무겁던 각주가 한참 달린 대학교 전공서적을 누군가가 한참 고민하고 편집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웰메이드 동화책으로 승화시킨 버전을 보는 느낌이랄까,
동화책은 문장을 읽는 게 어려운 아기들을 위해 몇 줄 안되지만 핵심만 콕콕 집어 그리고 적어준다. 그런데도 이 사업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어떤 플로우로 서비스가 진행되는지가 너무나도 간단명료하지만 논리구조가 명확하며 비약이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지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에어비앤비 아이알 덱을 바이블로 삼고 우리의 사업 아이템에 맞게 조금씩 추가 보완해보면서 시작해나갔다. 사내벤처 1차 보고라는 이름 대신 내부 NFU 231 피칭 데이로 타이틀도 새롭지만 오그라들게 정해서, 경영진들에게 우리의 보고를 알렸다. 경영진이라는 의사결정자들을 대상으로 어떤 자료의 전 영역을 다 맡아서 해보는 경험은 대학교 공모전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꽤나 오랜만에 최선을 다해봤다.
자료를 발표할 우리의 첫 번째 피칭 대표 스피커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팀에 첫 갈등을 안겨주었다. 사실 자료를 메인으로 만드는 사람이 발표하면 가장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작성자가 너무 과중한 업무와 시간 내에 완성도를 높이기 힘들 거라는 판단에 모두 합의를 했다. 우리 팀에는 다행히도 발표를 잘하는 사람들이 나 빼고 전부였다.. 다들 영업사원 출신이라 그런지 각자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발표를 즐기고 좋아했다.
이전 내부 커미티 때도 썼던 전략이지만 이번에 지원자를 받아 누가 하고 싶으냐고 물어봤을 때도 우리에게는 전형적이고 정말 발표를 잘하는 포멀 한 톤 앤 매너와 조금 전문성은 덜하지만 편안한 분위기에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스타트업스러운(?) 톤 앤 매너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두가지 모두 명확한 장/단점이 있었기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결국 후자의 스타트업스러운 톤 앤 매너의 발표자가 한번 더 하고 싶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최종 스피커로 결정되고 연습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작성자와 스피커가 다르기에 많은 수정이 예상되긴 했지만 정말 많은 수정을 거쳤다. 갑분 일기장처럼 감정적으로 작성자이자 발표를 지원해주는 입장에서도 그 나날들을 회상해보자면 뭐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이다.
모두가 처음 하는 일이다 보니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많이들 날카로워져서 예민함이 극도로 솟구쳤고, 스피커는 급기야 '이렇게 발표에 수정을 많이 요청하고 자기의 스타일을 존중해주지 않을 거면 난 발표자를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해버렸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셋은 예기치 못한 발언에 너무나도 당황했다
그러나 이제와서는 시간상으로도 다시 스피커를 바꾸는 일은 더 비효율적이고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꿀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발표 대본을 수정하고 하는 과정에서도 또 크고 작은 감정 갈등이 많이 생겼다. 우리 중 평소 가장 과묵하고 현실적이고 차분한 멤버가 참다 참다 자기가 한마디만 한다며 말을 꺼냈다. 나도 나름 이 순간이 충격이었어서 대사까지 또렷이 기억이 난다.
'xxx님이 주인공이고 여기 있는 분들이 다 xxx님을 빛내주려고 있는 조연들이 아니에요, 대본은 스피커의 몫이고 알아서 준비하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들 생각은 하지만 상황상 하지 못했던 내용이 평소 말을 가장 안 하던 멤버의 입에서 나오게 되니, 그 진실성은 배가되어 우리에겐 정적이 찾아왔고 스피커의 수정 요청은 사그라들었다. 아마 스피커는 그 말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그래도 끝내 자신이 맡은 몫을 다하려 최선을 다했다. 나머지 역시도 발표자의 흐름에 맡게 장표도 수정해주고 야근도 마다하지 않고, 주말도 출근했다.
우리의 아이템이 매력적일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나하나 장표를 넘겨보는 연습과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해 보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대망의 발표날 아침이 밝았다. 지난 3개월간 호랑이 회계 선생님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항상 채워주시고 이제는 정이 너무나도 많이 들어서 가족 같은 담당자분은 우리의 발표 자료와 발표 리허설을 보시고는
'이거는 왠지 될 거 같다'
라고 하신 순간에 나는 잠깐 울컥했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멤버의 마스크에 가려져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같은 감동이 밀려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는 왠지 될 거 같다고 나무랄 데가 없는 거 같다고 해주신 그 순간에 오고 나서의 수 많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경영진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