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과거의 조각들
2023년, 서울 - 지수의 발견과 결심
지수는 상담실을 나와 병원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진우'라는 이름이 자꾸 떠올랐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그녀의 약혼자 현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는 성공한 사업가로, 지수와는 2년 전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만났다. 그는 항상 차분하고 다정했으며, 지수의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어땠어?" 현우가 물었다.
지수는 미소 지었다. "괜찮았어.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아."
"다행이네. 오늘 저녁에 뭐 먹고 싶어?"
"음... 해산물 파스타 어때?"
현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아는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어."
두 사람은 병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때, 지수의 시선이 병원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멈췄다. 노인은 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다.
"잠깐만, 저기 좀 보고 올게." 지수가 말했다.
"응? 뭐가 보여?"
"저기... 시계 수리하는 노인."
현우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난 아무도 안 보이는데."
지수는 다시 벤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착각했나 봐."
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수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없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일찍 쉬는 게 좋겠어."
"괜찮아, 정말. 그냥 잠깐 헛것을 본 것 같아."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지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오래된 시계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우... 너는 누구니?"
차 안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손에 쥐고 있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계는 여전히 오후 3시 42분에 멈춰 있었고, 시계 안의 작은 톱니바퀴가 가끔씩 빛을 발했다.
지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다. 현우는 급한 업무 때문에 회사로 돌아갔고, 그녀는 혼자였다.
"이 시계... 누가 나에게 준 걸까?"
그녀는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조각들이 담겨 있었다. 사진들, 편지들, 그리고 작은 메모지들.
그녀는 천천히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었다. 그중 한 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었고, 그녀 옆에는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이 아이가... 진우인가?"
사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우와 지수, 1992년 5월 15일, 오후 3시 42분"
지수는 놀라서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 시간, 그 날짜. 그리고 그 소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은 2023년 5월 14일. 내일이면 정확히 31년이 되는 날이다.
지수는 갑자기 결심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열고 기차표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 일찍 부산으로 가는 KTX 표를 예매했다.
"진우야, 내가 널 찾으러 갈게."
지수는 잠시 망설였지만, 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수야. 무슨 일 있어?"
"현우야, 미안해. 갑자기 부산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부산? 무슨 일이야?"
지수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기억... 내 기억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찾은 것 같아. 며칠만 시간을 줄 수 있어?"
현우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혼자 가는 거야? 내가 같이 갈까?"
"고마워, 하지만 이건 내가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약속할게, 모든 걸 설명할 거야. 돌아오면."
"알았어. 조심히 다녀와. 그리고 뭐든 필요하면 꼭 연락해."
"고마워, 현우야. 사랑해."
그녀는 가방을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들을 챙기면서, 그녀의 마음은 이미 부산, 그리고 26년 전의 진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1997년, 부산 - 진우의 여정
빛이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또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해변이었다. 부산의 해운대 해변.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모래사장은 따스했다. 하지만 주변의 건물들은 지금보다 훨씬 낮고 소박했다.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자 모래사장 위에서 놀고 있는 두 아이가 보였다. 그중 한 명은 나였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나는 지수와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 크게 만들자!" 어린 지수가 말했다.
"응! 우리만의 성을 만들자!" 어린 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과거의 한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지수는 파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하얀 리본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그 머리띠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지수가 물었다.
어린 나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나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어."
"우와, 멋있다! 나는 높은 빌딩을 만들어서 하늘에 닿게 하고 싶어."
"그럼 나중에 내가 우주에서 네가 만든 빌딩을 볼 수 있겠네!"
두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해변의 파도 소리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어린 지수가 주머니에서 작은 조개껍데기를 꺼냈다. 그것은 분홍빛이 도는 아름다운 조개껍데기였다.
"이거 너 줄게. 내가 제일 아끼는 거야."
어린 나는 놀란 표정으로 조개껍데기를 받아 들었다. "정말? 나한테 주는 거야?"
"응! 너랑 나는 영원한 친구니까. 이걸 보면 날 기억해 줘."
어린 나는 조개껍데기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고마워, 나도 너한테 줄 게 있어."
어린 나는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똑같은 시계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할 때 받은 쌍둥이 시계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나에게 물려주었고,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이건 쌍둥이 시계야. 아빠가 나한테 준 건데, 하나는 네가 가져."
"정말? 나한테 줘도 돼?"
지수는 시계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
어린 나는 남은 한 개의 시계를 손목에 다시 찼다. 두 시계는 똑같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 시계로 연결된 거야.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지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수야! 이제 가자!"
지수의 아버지였다. 지수는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가봐야겠다. 내일 또 만나자. 항상 3시 42분에, 놀이터에서!"
"응! 약속할게!"
두 아이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내 손목시계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시계 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고, 내 시야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1997년, 부산 - 진우의 결심
빛이 사라지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방에 누워 있었다. 창밖으로는 밤하늘이 보였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손을 펴보았다. 그곳에는 작은 조개껍데기가 있었다. 지수가 나에게 준 그 조개껍데기였다. 나는 그것을 가슴에 품었다.
"지수야, 널 찾을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했다. 1997년의 인터넷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보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검색창에 "지수 부산 실종"이라고 입력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다음으로 "부산 해안도로 빛 내림 현상 1992년"이라고 검색했다. 몇 개의 기사가 나왔다.
"1992년 5월, 부산 해안도로에서 미확인 빛 내림 현상 목격"
"과학자들, 부산 해안에서 발생한 빛 내림에 대해 의견 분분"
"목격자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라고 증언"
나는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대부분은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명확한 답은 없었다. 그러다 한 기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빛 내림 현상 이후, 일부 주민들 기억 상실 호소"
기사에 따르면, 빛 내림 현상을 목격한 일부 사람들은 특정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그들과 가까웠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졌다는 것이다.
"이게 답이야..."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지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고,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리고 그 빛은 무엇이었을까?
더 많은 정보를 찾기 위해 나는 다시 검색을 시작했다. "시간의 조각"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했지만, 관련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진우야, 자니?" 누나의 목소리였다.
"아니, 들어와."
진희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거, 네 서랍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어. 네 것 같아서 가져왔어."
누나는 상자를 내게 건넸다. 나는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과 편지, 그리고 작은 메모지들이 가득했다. 모두 지수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건..." 나는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응, 네가 어릴 때 그 친구랑 주고받은 것들 같아. 지수였나? 그 애 말이야."
나는 천천히 사진들을 꺼내 살펴보았다. 지수와 함께 찍은 사진들, 그녀가 그린 그림들, 그리고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들.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누나, 고마워."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진희는 미소 지었다.
"뭘. 근데 갑자기 왜 그 애를 찾는 거야?"
나는 잠시 망설였다. 누나에게 모든 것을 말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가 믿어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문득 생각나서."
누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았어. 근데 너무 늦게까지 컴퓨터 하지 마. 내일 학교 가야잖아."
"응, 알았어."
누나가 나가고 나서, 나는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중 한 장이 특히 눈에 띄었다. 지수와 내가 해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진우와 지수, 1992년 5월 15일, 오후 3시 42분"
정확히 그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미스터리 한 빛 내림 현상이 발생한 날이었다.
나는 달력을 확인했다. 오늘은 1997년 5월 14일. 내일이면 정확히 5년이 되는 날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밤 11시 30분이었다. 내일 오후 3시 42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기다려봐야 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