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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자까 Apr 05. 2021

보통 작가들은 멋있게 말한다던데...

                                                

 ㅡ이전 편에 이어서


나는 무빙워크를 탄 것처럼 스르르 편집자님 앞으로 다가섰다. 편집자님은 손에 들고 보던 원고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바로 일어나 말했다.


 "우은빈 작가님이시죠. 정말 반갑습니다."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뚱목이와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날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제일 떨렸던 소개팅은 따로 있었지. 그 남자는... 아니 그게 아니고, 아무튼 나는 떨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투고한 원고를 보고 미팅을 잡은 출판사의 편집자님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작가님...(!?) 지금 저보고 작가님이라고 한 거 맞죠, 저 작가 시켜주는 거예요? 제 원고 책으로 만들어 주실 거냐고요! 마음속에선 이미 편집자님의 두 손을 꼬옥 잡고 난리 블루스였지만, 승무원 생활로 단련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___^.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___^*"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 편집자님은 본론부터 말하겠다며 시원하게 치고 나오셨다. 요는 이러했다. 많은 투고 메일에서 작가님의 원고가 마음에 와닿아 이렇게 뵙자고 했다. 글이 정말 따뜻하다. 비행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 얼마나 다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바라보는지가 느껴졌다. 다음 주 기획 회의에서 작가님 원고로 기획안을 만들어 올리겠다. 꼭 책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너무 황홀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계속해서 아니라고, 아니라고~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중언부언하며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그때 내 자세와 태도는 '아유, 제가 뭐라고요' 딱 이거였다. 아니 그렇게 자신 없게 굴 거면 대체 투고는 왜 했는지. 차라리 '우리 회사 승무원 중에선 제가 제일 잘 쓸 걸요~? 호호호' 이런 식으로라도 받아치며 웃어넘길 것을. 하지만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황송쩍은데, 내가 쓴 글에 대한 칭찬이 이리 쏟아지니 그냥 무방비 상태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일단 기획회의에서 통과가 되어야 계약을 할 수 있거든요. 제가 기획안을 잘 만들어서 강력하게 설득해볼 겁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그래도 한 명이라도 제정신이어서 다행이었다. 하긴 계약서도 아직 안 썼는데 뭘 또 그리 좋아하고 있는 건지 사알짝 마음이 차분해졌다. 원고 얘기를 하는 편집자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비치는 날카로운 눈빛도 이제 정신 차려야 한단 생각을 갖게 했다. 나는 괜히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엉덩이를 의자 뒤로 바짝 땡겨 앉았다. 편집자님은 말을 이었다.

 "원고와 목차를 봤는데, 목차에서 이렇게 제목만 나열하는 것보다 작가님의 원고를 카테고리화해서 키워드를 제시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작가님은 작가님의 원고를 어떤 키워드로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헉. 키워드?


 "키... 키워드... 제가 생각하는 키워드는..." 급기야 말을 잇지 못하고 궁지에 몰린 것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편집자님은 내가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너스레를 떨며 편안하게 말씀하시라고 대화를 이끌었다.


 "작가님,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음, 제가 원고를 보니까 작가님은 '사람'을 정말 좋아하는 분이던데요. 그래서 기내에서도 남다른 관찰력을 발휘하고요. 도움이 필요한 승객에게 먼저 다가가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선 눈치채지 못하게 뒤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요. 워낙 사람을 좋아하시고, 그래서 잘 해주는 걸 좋아하시죠? 주위 사람들도 그런 말 많이 하지 않아요?"


 그냥 "예"라고 했으면 되었다. "네, 맞아요!"라고 심플 앤 클리어하게 답했을 것을... 나는 뜬금없는 단어를 뱉고 말았다.

 "제가 자존감이 낮아서요..."

 "자존감이요?" 편집자님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래서 사람들한테 미움 안 받으려고 먼저 잘 해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왜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하세요?" 둘 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대화는 이제 묘하게 심리상담 비스름한 꼴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아, 저는 제가 뭐 하나 잘난 게 없다 생각하고 살았거든요. 얼굴이 특출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대학도 별로고 뭐 다른 뛰어난 능력도 없다 생각했고요...(갑툭튀 자기비하?) 어려서부터 외가, 친가의 친척 언니들이 다 너무 이뻐가지고 친척 어른들한테 외모 비교를 당한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승무원으로 일하니까 또 예쁜 애들 사이에 끼여 가지고... 나는 친절하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는데...(지금 상담하러 나왔니. 그만하라고!) 글을 써보고 싶다니 전 남자친구들은 능력엔 한계가 있다면서 다 저를 무시했고..(전남친들 얘기까지?)"

 마음 한구석에선 제발 좀 닥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씨불였다. 나는 왜 편집자님 앞에서 갑자기 자존감 낮은 아이로 둔갑해 상담을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우리 편집자님은 그걸 다 받아주셨다.

 "아이고, 어른들이 그 어린 나이의 아이한테 외모 비교를 하다니요~. 아니, 전남자친구들이 그런 말을 했어요? 작가님 능력의 한계를 감히 누가 정합니까."

 이렇게 글로 옮기고 있으니 편집자님 그날 참 고생 많이 하셨겠다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타이밍에 편집자님은 내 낮은 자존감을 한방에 날리고도 모자라 한껏 추켜세워주는 말을 하셨다.


 "작가님은 크게 되실 분이에요. 전 그걸 알겠더라고요. 나중에 잘 되시고 나서 저 모른 척 하기나 없기예요."


 나는 서둘러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척하면서 삐져나오려는 눈물을 집어삼켰다. 여기서 울기까지 하면 진짜 오늘 처음 만난 편집자님한테 못 볼 꼴 다 보이는 거다 생각하고 꾸역꾸역. 그리고 결국 키워드는 말씀드리지 못하고 헤어졌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깨달았다. 몇 개의 출판사로부터 반려메일을 받은 까닭을. 문제는 내 문장력이나 원고의 내용이 아니었다. 글쓴이부터 이 원고를 꿰뚫는 하나의 키워드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키워드가 없으니 독자를 잡아끄는 지점이 모호했던 거고. 편집자님도 그걸 알지만, 그럼에도 이 원고를 살려보겠다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이연실 편집자가 쓴 『에세이 만드는 법』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여러모로 저자는 책의 조물주인 동시에 책의 운명을 만들어가는 길잡이이다. 앞길이 막힐 땐 저자에게 물어보고 소통하면 많은 부분 새로운 아이디어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며칠 전에 이 글귀 앞에서 또 어찌나 작아지고 부끄럽던지. 나는 편집자님에게 힌트는 주지 못할망정 작가인 나부터 바로 서지 못한,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린 거다. 말하면 말할수록 대화가 삼천포로 흘러가기에 헤어지기 직전, 솔직하기라도 해야겠단 심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밑천이 다 드러난 기분이에요."

 편집자님은 슬몃 미소를 짓곤 이렇게 말했다.

 "작가님. 저는 작가님께서 자존감이 낮은지 높은지 잘 몰라요. 그런데 작가님 글을 읽고 이렇게 작가님을 뵈니까 이건 알겠어요. 작가님은 사실, 사람들을 마음으로 대하면서 작가님도 행복했던 거 아닐까요."

 그 말에 난 그저 고갤 끄덕이며 웃었다.


 집에 돌아와 그간 써온 글을 모두 펼쳐놓고 들여다보았다. 이 원고에 등장하는 수많은 승객과 나와 동료들이 담긴 이야기를. 나는 어떤 마음으로 비행을 했고 사람들을 만났는지. 답은 역시 또 내가 써놓은 글에 있었다.


 코로나로 승객들이랑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아쉽다. 맨날 승객들한테 먼저 말 거는 맛(?)으로 비행을 했던 사람인데.

 예전 글쓰기 수업에서 한 선생님이 말했다. 이게 비행기에서 진짜 이뤄졌던 대화냐고, 자기는 한 번도 승무원이랑 그렇게 길게 얘기해보지 않아서 믿기지가 않는다고.

 물어보고 궁금해하면, 생각보다 승객들은 많은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내 비행 인생에 잊지 못할 말을 남긴 승객들도 많다. 모두 고스란히, 내게 남겨진 말들. ㅡ인스타그램에 썼던 글


 편집자님 말대로였다. 자존감이 높고 낮음을 떠나 나는 기내에서만 이루어지는 승객과의 만남이 소중했기에 잘 응대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숨어있는 뒷이야기를 발견하고 살뜰히 챙기는 일은 결국엔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었다. 타인을 돕고 위하는 과정이 동시에 나를 살피는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아서, 란 말이 대뜸 나온 까닭은 뭘까. 딱히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오거나 비행한 것도 아니었는데. 출간을 너무 하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편집자님을 만나자 쪼그라든 모습으로 변모한 걸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런 질문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막상 질문을 받으니 그럴듯하게 대답은 해야겠는데 머리는 안 돌아가고, 멋지게 명언을 날리지 못하겠다면 사연이라도 있어 보이게 말해야지, 그렇다고 영 없는 일도 아니라 사실(친척 어르신의 망언이나 전남친들의 무시)이긴 했으니까.

 살면서 제대로 된 질문을 얼마나 받았던가. 뭐 먹었어, 내일 뭐해, 어디 놀러 갈까 같은 일상적인 얘기도 좋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좀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그런 질문을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도 참 행운이겠다. 나는 적어도 한 사람이 생긴 것 같다(계약을 해야 그렇게 되겠지만...☞☜).

 

 그에게 계속 질문을 받으며 썩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때까지. 그때쯤이면 책 한 권이 완성되어 있겠지? 그런 질문을 받으며 쓴 책은 분명 좋은 책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부디, 뻘소리한 작가로만 남아있지 않게 기획회의에서 내 원고가 통과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틀 동안 키워드를 생각해내 편집자님에게 전달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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