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요즘엔 광고 전화도 일반 핸드폰 번호로 많이 와서 안 받으려다가 혹시 다른 일일까 싶어서 받았다. 이사 가려고 부동산에 번호를 뿌려 놓았으니 부동산 사장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설마 출판사 아니야?'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계속 이어졌던 출판사의 [수신 확인, but 답장 없음]과 [반려메일] 덕분에 기대조차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OO~입니다." 덜컹거리는 전차 소리에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네~에~" 광고인가 싶어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네, 작가님! 반갑습니다. OO출판사의 OO 편집자입니다."
독자 여러분, 아스팔트 바닥에 핸드폰을 내리꽂듯이 떨어트리자마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집어 들어 액정을 확인하기 전까지의 그 쫄깃한 기분을 아시는지. 내 심정이 딱 그랬다. 쫄깃~하니 쫄리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아...? 예, 예! OO출판사라는 말씀이신 거죠? 제, 제 원고를 보고..."
그리고 기적처럼 무사한 액정을 확인하고 나면 터지는 안도의 한숨.
"네! 작가님의 투고 메일 잘 보았습니다. 글이 정말 좋더라고요. 작가님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은..."
거기까지 듣다가 목적지까지는 한참 남아있었으나 문이 열리자마자 그냥 내려버렸다. 지금 출.판.사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투고한 출.판.사의 전화인 것을!!! 나는 공손하게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부여잡고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전화했다. 그리고 미팅 날짜를 잡았다. 아직 계약한 것도 아닌데, 일단 신이 나기에 당장 누구라도 붙잡고 얘기하며 이 불타는 속내를 풀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질 못했다.
세 달 전, 내 원고에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계약으로까지 이어지진 않았던 출판사 이후 뚱목이와 나눈 대화 때문이었다. 뚱목이는 일이 잘 성사되기 전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주의였다. 말하면 좋은 기운이 새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나는 무슨 일이 조금 풀릴 기미라도 보이면 즉각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 공유했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네가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모여 좋은 기운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난번 주위 모든 사람에게 입방정을 찧는 내 모습을 본 뚱목이가 말했다.
"다음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혼자 해봐. 그럼 될 거야."
"여보한테도?"
"응, 나한테도."
"그건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아니, 혹시 네가 내 얘기 듣기 싫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뚱목인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매일 밤 내 넋두리를(오늘도 연락이 없네,,, 내일은 올까,,,?) 들으며 내심 지겨워했던 뚱목이의 작전일 수도 있단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 또 '진짜 괜히 여기저기 말해서 좋은 기운이 다 날아갔나?'싶은 생각도 들었기에 다음엔 얘기를 안 하기로 다짐해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미팅에 나갔다. 일요일 오후, 편집자님께서 친히 집 근처 카페로 와주셨다.
편집자님께선 카페에 먼저 와계셨다. 도착하면 서로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하기로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이 단박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편집자님은 안쪽에 앉아 종이뭉치를 들척이며 보고 계셨고,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편집자' 그 자체였다. 그냥 원고를 보고 있어서가 아니라 원고를 손에 든 각도와 글을 훑어보는 눈빛과 뿔테안경 위로 살짝 찡그린 눈썹에서 '나 지금 이 원고에 집중하고 있어'라고 강하게 풍기는 아우라가 그랬다. 영락없는 출판인인 그의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난 망했다'였다.
나는 말하면서 머릿속 생각과 마음이 정리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 말을 하지 못했다! 출판업계 종사자 포스를 폴폴폴 풍기는 편집자님을 보고서야 오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정리가 안 된 채로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이어질 대화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날의 대화를 집에서 복기하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벌게졌으며, 이불킥으로도 모자로 베개에 코와 입을 처박고 소리를 질러댔다. 부끄러움을 넘어 망신살 뻗치는 나의 발언은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