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작가가 책의 서문이나 에필로그에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의 이름과 그와의 사연을 털어놓는다. 혼자서는 절대 쓸 수 없었을 거라는 말을 읽으며 그들이 나누었을 마음만 짐작해볼 뿐이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과 손길이 꾹꾹 눌러 담긴 책, 그러니까 책이란 물성은 더 특별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직 책을 쓴 것도 아니지만 책을 쓰기 위해 출판사에 투고하는 단계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무작정 써온 원고만 쌓이고 있을 뿐, 출판사에 투고할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MBC 김나진 아나운서가 책을 낸다는 소식을 전해왔다(책은☞『포기할까 망설이는 너에게』, 김나진, 2020). 정말 축하드린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그는 내 책도 빨리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며 '글도 그림도 최고니까'란 말을 덧붙였다. 그의 칭찬에 헤벌쭉 해진 나는 출간기획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는 10분도 안 되어 내게 기획서 양식과 출판사 투고 메일 리스트를 내주었다. 자신이 쓴 기획서를 보여주기 부끄러울만 한데도 불구하고 직접 쓴 기획서 내용까지 포함해 주었기에 참고하기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그가 제공한 기획서 양식을 바탕으로 출간기획서를 써서 투고해 계약을 맺었다.
몇 날 며칠 기획서를 쓰며 비행할 때였다. 그날 비행은 마침 오현호 기장님과 하는 날이었다. 비행을 함께 한 적이 많진 않았지만 그가 책을 낸 저자임을 생각해낸 나는 한번 물어나 보자 싶었다(책은☞『부시 파일럿, 나는 길이 없는 곳으로 간다』, 오현호, 2016).
"기장님, 제가 그간 비행일지를 써왔는데요. 그걸 책으로 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처음 써보는 기획서라 막히는 지점이 좀 있더라고요... 혹시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
그는 주저함 없이 말했다.
"물론이죠! 사무장님 글 기대되는데요? 출간기획서 제가 봐드릴게요.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나는 그 제안을 덥석 물어 비행을 마친 다음 날 바로 기획서를 보내버렸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내가 보낸 한글 파일이 고대로 돌아왔는데, 파일을 열어보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작성해놓은 검은 글자보다 기장님이 피드백으로 적은 파란 글자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기획서를 들여다보고 고심해서 피드백을 준 흔적이 역력했다. 심지어 전체 원고를 쓴 나보다 원고의 포인트를 예리하게 집어낸 부분이 그랬다. 그러니까 나는 김나진 아나운서가 제공한 기획서 양식으로 오현호 기장님의 피드백을 받아 출간기획서를 작성해서 투고해 계약을 맺은 거다.
이들은 내게 격려의 말도 아끼지 않았다. 출간 계약 소식을 바로 전했을 때, 둘의 반응은 똑같았다.
"세상에 나올 이야기였으니까요. 절대 의심하지 않았어요."
내가 가슴 졸이고 걱정할 때, 오히려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이들이 있다는 건 무척이나 든든한 기분이 들게 하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게도 그런 친구가 하나 있다. 친구는 불투명한 자기 앞날에 불안해 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자기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MBTI 강사 과정을 다니다가→DJ를 배우고→꽃꽂이 학원 한번 들렸다→영상편집 학원에도 갔다가→인테리어 학원을 또 다니고→지금은 사진을 배우고 있다. 도대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데, 적어도 좋아하지 않는 일은 하나씩 알아가고 있지 않은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이 친구처럼 자기 자신을 탐색하는 친구가 또 없다. 그래서 나는 옆에서 친구가 얄미워할 만큼 태평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야, 걱정하지 마. 그러다 언젠가 찾는다, 꼭 만난다." 내가 그러는 까닭은 분명하다. 나는 그 친구가 여러 우물을 파다 언젠가 물길과 만나 강줄기를 찾을 거라고, 그래서 널리 나아갈 거라고 찰떡같이 믿어서다. 내 눈엔 그게 훤히 보인다.
어쩌면 우린 그런 힘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 자신조차 미덥지 못할 때, 내겐 미처 보이지 않는 나의 앞날을 나보다 멀리 그리고 밝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힘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ㅡ『죽은 왕녀의 파반느』, 박민규ㅡ
출간 계약을 하기 전에도 하고 난 후에도 편집자님은 내게 말했다. "잘 되실 겁니다. 작가님이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어쩌자고 대책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싶어 몸 둘 바를 몰랐었는데 이젠 알겠다. 편집자님은 내 글을 나만큼이나 아끼는 마음으로 나라는 사람까지 믿고 상상해본 거다. 그리고 그 상상의 힘은 강하다. 그러니 나의 상상력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발휘될 수밖에. 그렇게 발휘되는 상상력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하고 아름다운 상상일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