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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자까 Oct 08. 2021

 푸짐하고 넉넉한 마음


아부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북적거리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바깥에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옆에 있는지 아부지도 떠듬떠듬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 통화를 금방 마무리했다. 10분쯤 지났을까. 아부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실은 볼 일이 있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북적거리는 소리의 배경이 휴게소였던 것이다. 서울에 온다고 하면 내게 괜한 부담이라도 줄까 봐 말을 안 한 모양새였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다짜고짜 내뱉었다.


"왜 진작에 말을... 아부지, 어디서 자게?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못 이기는 척, 그렇게 넘어오길 바랐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엄마에 이어 아부지까지 지방으로 내려간 뒤, 부쩍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비행 없는 평일이나 주말에 우리 부녀는 한남동이며 이태원에서 데이트를 만끽했는데, 다시 그런 시간을 가질 날이 오기나 할런지. 어디서부터 퍼먹어야 할지 모르겠는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생긴 디저트 앞에서 머뭇대던 아부지는 귀엽기만 했다. 우리는 엄지손가락 두 개를 붙여놓은 크기만한 디저트를 한 숟가락씩 나누어 먹었다. 그런 아부지가 서울에 오는데 당연히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저녁 7시를 넘긴 시각이었고, 내일은 각자 잡혀있던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에, 본다면 우리 집으로 모시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는데, 마침 씻고 나온 뚱목이에게 말했다.

"아빠, 내일 일 있어서 서울 올라오는 길인데,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그랬어."

"엇? 그럼 치킨 시켜드려야지."


뚱목이는 툭하면 장인어른에게 치킨을 사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엄마가 닭 냄새를 싫어해 연애시절부터 통닭 한 마리 제대로 못 먹어본 스토리를 알기 때문이다. 아부지가 프라이드치킨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한 번을 같이 안 먹어준 게 미안했다며 엄마가 지난 술자리에서 했던 소리가 기억에 남은 것 같다. 뚱목이는 아부지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치킨과 피자를 시켰다. 피자 드신지도 오래되셨을 거라며 추가로 주문했다. 엄마랑 아부지가 있는 시골은 배달이 아예 안 되는 지역이다. 배달의 민족 어플로 배달 가능한 매장을 검색하면 '텅' 한 글자만이 떠있다. 부러 시내에서 피자를 사와 드시진 않았을 것 같으니, 뚱목이가 선정한 메뉴에 나도 만족했다.


셋이서 치킨과 피자, 느끼한 속을 잡아줄 불닭볶음면까지 야무지게 먹어치웠다. 맥주도 몇 캔씩이나 비웠다. 마트에서 카스나 테라만 골라마시던 아부지는 편의점에서 4개 만 원으로 사 온 세계 맥주를 맛있어했다. 12시가 지나고 나서야 내 방에 아부지 이부자리를 펴드렸다. 아부지는 뚱목이 방은 창고 같은데, 내 방은 널찍하니 너무 좋은 거 아니냐고 웃으며 말했다.


다음날 아침, 버섯을 넣은 야채죽을 해먹고 아부지는 일찍 집을 나섰다. 뚱목이와 아부지를 먼저 보내고 뒷정리를 했다. 커피를 내려 소파에 앉아 잠시 쉬는데, 그저께부터 이어지던 가을비가 어김없이 내리고 있었다. 일을 보고 바로 다시 시골로 운전해서 내려갈 아부지에게 마음이 쓰였다. 피로하겠다고, 생각했다.


퇴근한 뚱목이가 어제와 똑같은 패턴으로 씻고 나오며 말했다.


"그래도 어제, 아버님이 잘 드셔서 좋았어."

"그래?"

"응. 아버님 다 같이 있을 땐 별로 안 드시잖아. 근데, 어제 알았어. 아버님이 양이 결코 적은 게 아니더라고."

나는 또 똑같이 물었다. "그래?"

"지난번 코다리찜 가게에 모였을 때도 아버님 잘 안 드셨잖아. 우리 더 먹으라고. 어쨌든 어제는 양껏 드셔서 뿌듯했어." 말을 마친 뚱목이는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드라이기 소리에 바깥에 내리는 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무어라 말해도 잘 들리지 않을 터였다. 고맙다고, 조용히 말해보았다. 그 소리를 들을리 없던 뚱목이는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이나 털어댔다.


그저 고마웠다. 아부지가 집에 온다고 했을 때, "아버님 오시면 치킨 시켜서 먹어야지~!"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말한 뚱목이에게 고마운 마음이었다. 불편하거나 싫은 내색 하나 없었다. 나는 아부지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말에 뚱목이에게 묻지도 않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그래도 물어보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당연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당연히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뚱목이라는 점. 뚱목이가 그간 나와 살면서 내가 눈치보지 않고 행동하고 말하게 만들어주었던 거다. 나는 뚱목이 앞에서 '당연히 그래도 된다'라고 생각한 게 너무 많았다. 그중에서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되는 단 하나는 그런 뚱목이의 마음 씀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뚱목이라는 애칭은 결혼 이후 자꾸만 살이 찌는 모습, 뚱뚱해지는 모습이 귀여워 이름에 '뚱'자를 넣었던 건데, 아무래도 가장 푸짐하고 넉넉해진 건 뚱목이의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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