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비행 생활을 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면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아픈 승객이 발생했을 때, 승객 간 다툼이 일어났을 때,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 피우고 있는 승객을 발견했을 때, 항공기 이상으로 이륙이 몇 시간씩 지연됐을 때, 기상 상황이 좋지 않아 착륙 공항이 변경될 때, 괴팍한 사무장과 함께 비행할 때, 서비스 물품이 다 떨어졌을 때, 승객이 난폭한 언행을 보일 때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하늘 위 [기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비행하는 일은 다사다난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좁은 공간에서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 일은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이착륙 지연이나 항공기 정비 문제로 비정상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정해진 매뉴얼대로 처리 절차를 밟으면 된다. 이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선임들은 비정상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몇 년 간의 실전 경험을 통해 매뉴얼이 몸에 배어있기 마련이고, 신입들은 혹시 모를 비정상상황을 대비해 매 비행 전에 끊임없이 리마인드를 하니까. 정해진 처리 절차가 있다는 것은 융통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지만, 보면서 따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적인 부담을 덜어준다.
승무원에게 항공기 정비나 비정상상황보다 어려운 일은 역시, 사람의 얼굴이다. 그날 비행의 기장과 사무장, 선후배 및 동료 승무원, 비행기를 최적의 상태로 준비해 준 정비사와 서비스 물품을 알맞게 실어준 케이터링 직원, 처음 만나는 낯선 얼굴의 승객들까지 하나의 비행에서 마주하는 얼굴이 너무 많다. 이 많은 얼굴들 사이에서 가장 쉽고 거칠게 상처를 주는 얼굴은 승객이겠다.
그간 비행을 하며 몇몇 승객에게 상처받은 적도 있지만 결국 다시 다감한 승객 덕분에 웃어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나는 웬만한 수준이 아니라면 승객의 반응에 크게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가끔 갤리에 들어선 승무원의 목울대가 붉거나, 충혈된 눈에 눈물이 고여 있을 때는 십중팔구 승객에게 험한 소리를 듣고 온 때였다. 그럼 우리는 부들부들 떠는 동료의 등을 쓰다듬으며 괜찮아, 괜찮아 소리만을 연발했다.
그날 비행에서는 하필이면 승객을 태운 상태에서 정비 문제가 발생했다. 승객 탑승 전이라면 게이트 앞에서 ‘항공기 정비 문제로 탑승이 지연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을 내보내면 그만이다. 승객 입장에서는 기내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정비사와 승무원을 보지 않아도 되니 더 크게 초조해하지도 않을 터이다. 간혹 점검 중 엔진을 꺼버려 기내 전체가 깜깜하게 어두워지기라도 하면, 승객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어린애들은 아직 이륙도 안 했는데 추락이다, 추락! 하며 소리를 빽-하고 지르기도 했다).
승객이 탑승한 상태에서 정비 점검을 시행하면 승무원은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송을 실시하고 일대일 대면 서비스 안내를 한다. 짜증 내거나 불평불만을 털어놓는 승객의 컴플레인은 덤으로 떨어진다(뭐요?! 한 시가안!? 내가 이래서 대한항공이 아니면 안 타려고 하는데, 에이 씨!). 그래도 비행기 정비 문제가 승무원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기에 어쩔 수 없다.
그날 사무장인 나는 기장님과 지상 직원으로부터 정비 문제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승객이 탑승한 직후였기에 곧바로 승무원들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공유하고, 기내 방송을 실시했다. 그리고 각 승무원을 기내에 골고루 배치시켜 혹시 있을 승객의 질문에 적절히 응대하도록 지휘했다. 우리는 앞으로 발생할 승객의 불만을 묵묵히 감수할 작정이었다.
“마냥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라고는 말하지 마세요. 승객 입장에서는 10분이 걸릴지, 1시간이 걸릴지 짐작할 수도 없으면 얼마나 애가 타겠어요. 도착 공항에 마중 나와 있는 사람한테 알려야 한다거나 회의나 약속 시간을 변경 해야 할 수도 있잖아요. 승객분한테 도착 시간은 무척이나 중요한 거예요. 일단 기장님께서 약 30분 소요된다고 말씀하셨으니, 방송은 제가 이미 했지만 혹시나 못 들으셨거나 재확인 차 물어보는 승객분이 계시면 예상 소요 시간은 최소 30분이라고 다시 안내해 드리세요. 그리고 정보를 받는 대로 신속히 알려드리겠다는 말씀도 덧붙이고요. 그럼 이제 천천히 걸어 다니면서 승객분 잘 살피시고, 다른 특이 사항 발생 시 바로 저한테 인터폰으로 보고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선임 승무원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제일 먼저 기내를 향해 나섰고, 신입 승무원은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내로 따라나섰다. 나는 손목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정비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곧이어 나도 사무장으로서 기내를 총괄해야 했기에 기내로 나갔다. 의외로 승객들은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인내심이 좋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안심하려는 와중에 기내 뒤쪽에서 신입 승무원이 쩔쩔매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앉아있는 승객을 향해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고 있는 뒷모습이었는데, 분명 곤란해하는 꼴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재바르게 놀려 기내 뒤쪽으로 성큼 건너갔다.
젊어 보이는 여성 승객이 목소리를 높여가며 말하는데 우리 막내는 무어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막내 승무원의 뒤쪽에 바짝 다가서고 나서야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아니, 탑승 전에 이미 정비가 완벽하게 돼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무섭고 불안해서 비행기를 탈 수가 없잖아!"
나는 재빨리 막내 승무원의 앞쪽으로 나서 승객의 말을 받았다.
"네, 손님. 오늘 비행의 사무장 날돼입니다. 항공기 재정비로 이륙이 지연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이는 승객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오니, 불편하시더라도 조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끝내 모진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아니~! 아가씨들이야 떨어져서 죽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집에 아기가 있어. 애 엄마라고 내가. 나는 떨어져서 죽으면 안 된다고오~!"
그 말을 듣는 내 눈가가 떨려왔다.
이후의 이야기는 1월에 출간되는 저의 책에서 이어집니다.
책에 싣게 된 글이라 생략한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