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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자까 Apr 24. 2020

청소부를 자청한 기장과 승무원

비행기라는 밥상에서

 "죄송합니다만, 비행 탑승 시간이 지연되었습니다."


 공항에서 비행 출발 지연 방송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비행은 폭풍우와 폭설로 아예 결항이 되거나 공항이 안개에 싸여있다면 안개가 걷힐 때까지 하염없이 지연되기도 합니다. 또는 비행기 정비 문제로 늦어지는 것도 흔한 일이죠.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자 승객들은 슬슬 열이 오릅니다. 지상 직원들이 특별한 추가 설명도 해주지 않네요. 물어보더라도 시원한 대답이나 대책을 제시하기는커녕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합니다. 발끝부터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지요?


 어느덧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도착지 공항에 착륙한 다음 교통수단이 걱정입니다. 지금 당장 출발하더라도 도착하고 나면 지하철과 버스는 끊겨 있을 테고, 공항에서 숙소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하자니 비용이 만만치 않겠습니다. 아, 벌써부터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긴다는 생각에 신경질이 납니다.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비행 탑승이 개시되었습니다. 이미 지쳐버린 승객들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서 비행기에 오릅니다. 개중에는 승무원을 표독스러운 눈으로 쏘아보는 분이 더러 있습니다.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와 왜 이렇게 늦는 거냐며 대뜸 화부터 내시는 분도 있지요. 아직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긴장되고 등골이 서늘합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있는 승무원이어야 되겠습니다.


 저는 2017년 8월 초강력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을 강타하기 직전에 휴스턴으로 비행을 다녀왔습니다. '하비는' 13년 만에 미국에 찾아온 4등급 강도 허리케인이었습니다. 이 허리케인으로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물론 인명 피해까지 속출했습니다. 피해 복구 비용이 무려 203조 원에 달한다고 텍사스 주지사가 밝혔지요.


 제가 휴스턴에 머물 때에도 비가 거세게 내리고 바람소리가 귀신 곡소리처럼 울려 퍼졌습니다. 비바람에 호텔 방 창문이 귀싸대기를 맞는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졌지요. 비행기가 제대로 뜰 수나 있을까 걱정됐습니다. 사실 진짜 우려할 상황은 비행기가 뜨기 전, 기내를 준비하는 일에서부터 펼쳐졌지만요.


 보통 승무원들이 비행기에 오르면 기내는 깨끗하게 청소돼 있습니다. 이미 승무원이 타기 전에 청소 직원분들이 정리를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승무원들이 빨리 탑승하면 기내 청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하죠. 기다리며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저는 엄두도 내지 못하겠더라고요. 이전 비행 편에서 먹다 버린 과자 봉지와 음료수 병, 흐트러진 담요와 베개, 헝클어진 이어폰 줄로 마구 어질러진 기내는 난장판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청소 담당분들은 일사천리로 청소를 진행합니다. 적게는 열 명에서 많게는 스무 명 내외 직원이 청소 일을 분담하여 말없이 사부작사부작 정리합니다. 한 사람은 청소기만 밀며 바닥에 깔린 먼지와 과자 부스러기를 해치우고, 다른 한 사람은 좌석 주머니에 꽂혀있는 팸플릿을 정리하고, 또 다른 사람은 베개 커버를 갈아 씌우는 식이죠.


 그런데 그날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청소해 주는 직원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닥에는 크고 작은 쓰레기와 정체 모를 부스러기가 가득했고, 좌석 위에는 제멋대로 나자빠진 담요와 베개들로 너저분했습니다. 기내 청소가 제대로 되어있어야 승객들을 속히 태울 텐데 말이에요. 문 앞에서 난장판인 기내를 보고 동료들과 의아해하고 있는데, 지상 직원이 우리를 향해 급하게 달려왔습니다. 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슬프게도 매번 적중하지요. 그녀는 믿고 싶지 않은 말을 내뱉었습니다.


 "암 쏘 쏘리...! 오늘부터 태풍이 더 심해져서 직원들이 출근을 못 했어요. 지금 일단 급한 대로 청소 직원 두세 명이 탈 겁니다.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승객들에게는 기내 준비 때문에 탑승 지연이 있겠다는 방송을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지상 직원은 게이트를 향해 재바른 걸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정말 청소 직원이 딱 두 명만 타는 것 아니겠어요. 평소에는 거의 스무 명씩 우르르 몰려와 지저분한 기내를 한 번에 싹 치우고 갔는데 말이죠. 기체 앞쪽에 자리한 퍼스트 클래스부터 비즈니스 클래스, 뒤쪽 이코노미 클래스까지 빽빽하게 놓여있는 좌석들이 막막하게만 보였습니다. 앞쪽에서부터 청소를 시작한 두 분의 모습이 참 동떨어지고 쓸쓸해 보였죠. 결국 저희 승무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씩 유니폼 재킷을 벗어던졌습니다. 기내 청소를 하는 게 저희 업무까지는 아니지만, 별다른 수가 있나요. 청소가 늦어져 승객들 탑승이 지연되는 일은 막아야지요. 함께 해서 최대한 빨리 기내 청소를 마쳐야 했습니다.


 저희는 야무지게 비닐장갑을 양손에 낀 다음,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들어 본격적으로 청소할 태세를 갖췄습니다. 각 클래스 사무장들도 좌석 앞주머니를 정리하고, 새 슬리퍼를 꽂아 넣은 다음 좌석마다 늘어뜨려진 이어폰 줄을 가지런히 정리했습니다. 그래도 영 속도가 붙지 않았습니다. 비좁은 좌석 사이에서 손과 발을 놀리며 청소하기란 생각보다 어렵더군요. 잠시 한숨이 나오려다가도 출발 지연으로 승객들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아 낼 생각이 들어 재빨리 움직였습니다. 그러다 좌석 팔걸이에 허벅지를 몇 번이나 부딪혔는지. 비행하다 생긴 파란 훈장이 하나 더 늘겠습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청소하다 생긴 훈장이겠죠.  


 고개를 좌석 사이로 처박고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청소를 하고 있는데 뚜벅뚜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청소 직원들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머리를 홱 들어 올렸습니다. 남자 세 명이 일손을 보태겠다고 양손에 비닐장갑까지 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 기장님들이었습니다. 기장님과 부기장님은 비닐장갑을 낀 손을 요리조리 흔들어 보이며 개구지게 웃었습니다. 브리핑 때 무뚝뚝하고 차가워만 보이던 기장님들이 맞는지 싶을 만큼 말이죠.


 "기장님!!!!??!?!"


 같이 청소를 하고 있던 동료들 모두 기쁨 반, 놀라움 반의 심정으로 무턱대고 기장님이라 소리쳐 불렀습니다. 기장님은 부끄러운지 슬몃 웃으며 말했습니다.


 "허허, 이런 상황에 우리도 도와야지요. 그래, 뭐부터 하면 되나?"

 "기장님, 감사해요...! 음, 그럼.."


 고마운 마음도 잠깐이지요. 저희에겐 해야 할 일이 아직 너무 많았습니다. 기장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기장님이 도와주어야 할 일을 아주 빠르게 읊어버렸습니다.

 "기장님들은 그럼... 지금 이코노미 클래스 담요랑 베개 세팅이 하나도 안 되어 있거든요. 담요를 네모나게 각 잡아서 접은 다음에 자리 위에 올려두고요. 베개는 커버를 새 걸로 다시 씌어야 해요. 베개 커버 다 벗기고... 새 커버를 씌워주세요. 여기 새 커버 드릴게요! 이코노미 클래스 18번부터 42번 좌석까지요! 괜찮죠? 감사합니다!!!"


 조종실에서 상주하는 기장님은 18번부터 42번 좌석까지 한 번 훑어보며 거리를 가늠해봅니다. 네, 조금 깁니다. 그래도 우리 기장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간단하다고 호기롭게 말합니다. 그렇게 세 분의 기장님이 담요와 베개 세팅 작업을 맡았습니다. 승무원 열다섯 명과 기장 세 명이 30분간 청소에 몰두했습니다. 기내는 어느 정도 깔끔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죠. 깨끗한 기내를 돌아보며 기장님과 승무원들은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요. 땀으로 겨드랑이와 등까지 축축하게 젖었습니다. 기장님들은 땀을 식힐 새도 없이 다시 조종실로 돌아가 착석했습니다. 이제, 기다리느라 성이 난 승객들 탑승을 개시해야지요.  


 아니나 다를까. 매서운 눈빛으로 째려보며 탑승하는 승객분이 몇 있었습니다. 탑승 전부터 한바탕 이루어진 청소 소동으로 지쳐버렸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도착지까지 열세 시간 비행 동안 승객분들을 살살 달래며 가야겠지요. 그래도 저는 출발이라도 할 수 있었지, 저보다 하루 이틀 늦게 휴스턴에 도착한 동기들 사연은 더 지독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동기 언니는 꼬박 8일을 호텔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이틀 늦게 도착한 동갑내기 동기는 7일을 호텔 방안에서만 보냈습니다.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제게 그녀들이 보낸 메시지는 눈물 없이 볼 수 없었죠.


 "날돼야, 잘 도착했니? 허리케인 때문에 이륙을 아예 못할 것 같아서 하루 더 스테이 하게 됐어. 빨리 한국 가고 싶은데..."

 "슈퍼도 쇼핑몰도 문을 다 닫았어. 비도 너무 많이 오고. 호텔에서는 호텔 바깥으로 나가지도 말고 창문 가까이에 서있지도 말라고 계속 경고 방송이 흘러나와. 무서워! 흑흑.."

 "너 정말 잘 피해 갔다. 폭우가 너무 심해서 물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아. 비행기가 언제 뜰 수 있을지조차 모른대. 공항 근처 자동차는 전부 물에 잠겨있어. 먹을 거 싸온 건 다 해치웠고, 룸서비스도 더 이상 안 된대. 호텔에서 아침 점심 저녁마다 간단하게 음식이 차려지기는 하는데... 맛도 없고... 제때 일어나서 못 먹으면 다음 식사 시간까지 완전 쫄쫄 굶어."

 "벌써 일주일이 넘었네. 폐쇄됐던 공항이 내일 드디어 재개된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 가자마자 신전떡볶이부터 시켜 먹을 거야!"


 그녀들은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호텔에서 빠져나와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물바다였던 공항은 어수선하지만 어느 정도 수습이 돼있었고,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무사히 떴습니다. 원래 2박이던 숙박 기간이 8박으로 늘어나버린 대장정 비행이었지요.


 비행이 지연되면 승무원의 업무도 가중됩니다. 승무원뿐만 아니라 비행 관련 모든 직종이 그렇겠지요. 천재지변으로 인한 비행 지연은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는 승객들 마음도 이해합니다. 각자 개인적인 사정과 중요한 일이 있고, 제때 소화해내야 하는 일정이 있겠지요. 저희도 기왕이면 빨리 비행 일을 시작하고 끝낸 다음 집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의 비행기를 뜨게 하기 위해서 수많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읍니다. 예약이나 발권을 담당하는 탑승 수속 카운터 직원, 승객의 여행 가방에서부터 수출입을 위한 화물과 국제택배까지 하늘을 통해 실어 나르는 화물 운송업 담당 직원, 항공 정비사, 항공기를 정해진 코스로 유도하고 안전한 이착륙을 도와주는 관제사, 공항 내외의 야생 동물과 서식지를 관리하는 야생조수 관리소 직원, 기내에서 서비스되는 기내식과 각종 소모품을 탑재하는 케이터링 직원, 더럽혀진 기내를 정리 정돈해 주는 청소 직원 등드르등등. 제가 미처 언급하지 못한 항공 관련 직업은 너무 많이 있습니다.


 휴스턴 공항에서 비행기 바퀴가 완전히 물에 잠겨있는 사진을 보면서,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공항에서 진땀 빼는 직원들을 지나치면서, 저는 황정민의 밥상 수상 소감을 떠올렸습니다. 2005년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밥상 수상 소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항상 사람들한테 그래요. 일개 배우 나부랭이라고. 왜냐하면… 60여 명 정도 되는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놓아요. 그러면 저는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근데, 스포트는 제가 다 받아요. 그게 정말 죄송스러워요……. 제가 한 거는… 여기 이 여자 발가락 몇 개만(수상 트로피) 떼어 가면 제거 같아요. 스태프들한테, 그리고 감독님한테 너무너무 감사드리고요….”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비행기에 오르면 느껴집니다. 이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부지런히 일한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다가옵니다. 저는 단지, 다른 분들이 잘 차려놓은 비행기라는 밥상에 올라탄 기분입니다. 수많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정성스러운 밥상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쉬이 망쳐놓을 수는 없겠지요.


 승무원들이 갖는 승객의 안전에 대한 책임감과 친절한 미소는 비단 승객들만을 위해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의 안전한 비행을 위해서 애쓴, 수많은 사람의 노고를, 감히 짓밟을 수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저희가 잘 차린 밥상을 편안하고 맛있게 드시면 됩니다!

 배부른 마음에 저희에게 "고맙습니다" 또는 "수고하셨습니다" 이 한 마디만 주시면 저도 맛있게 먹겠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flying_woop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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