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이 되어버린 엄마

가정에서 독립한 걸 축하해

by 우자까


오늘은 일자로 잘 빠진 검은색 정장 바지에 버건디 색 블라우스를 입고 스카프를 걸쳤다. 스카프는 밝은 회색과 인디핑크 색이 어우러져 오묘하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은 색감과 그렇다고 너무 단순한 패턴으로 투박하지만은 않은 디자인의 옷들이 내 옷장을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대충 걸쳐 입어도 모난 모양새는 아니다. 유니폼을 입지 않고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에는 옷장 안의 옷들 중 아무거나 대충 집어 입는다.


그간 유니폼을 착용한 채로 출퇴근했고 비행하지 않는 날에는 편하게 청바지에 티를 즐겨 입어 마땅히 입을만한 오피스룩이 없었다. 오늘처럼 사무실에 나갈 때 요긴하게 입는 옷들은 엄마가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기 전에 내게 주고 간 것이다. 엄마는 평소 멋쟁이로 클래식한 스타일의 옷을 잘 소화해냈다. 운동을 꾸준히 하며 살아온 엄마이기에 몸매는 어찌나 날씬한지, 뒷모습은 영락없는 아가씨다. 엄마는 옷 하나를 살 때도 몇 날 며칠 고민하며 신중하게 샀고, 관리도 잘해 10년은 물론이고 20년 된 옷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주로 유행을 타지 않는 심플한 디자인이어서 그런지 20년 전의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여전히 예뻤다.


대학생 시절에는 그런 엄마 옷을 종종 입고 나갔다. 물론 몰래 나갔다. 먹다가 꼭 옷에 흘리거나 튀기거나 엉덩이에 얼룩을 묻혀오는 내게, 엄마가 그 아끼는 옷들을 빌려줄 리 만무했다. 그래서 몰래 입고 나갔다. 친구들은 언니 옷을 몰래 입고 나오던데 나는 엄마 옷을 몰래 입고 나갔다. 언니가 없다고 나처럼 엄마 옷을 입는 친구는 없었다. 확실히 우리 엄마 옷은 아줌마 스타일의 옷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일 같다. 친구들은 설마 이것도 엄마 옷이냐고 물었고, 나는 늘씬하고 패션 센스까지 뛰어난 엄마를 두었다는 자부심에 어깨를 으쓱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입었던 옷을 엄마 옷장 속에 살짝 걸어두었다. 며칠 뒤 엄마에게 등짝 한 대 세게 맞는 건 감수할만했다.


엄마는 내가 독립을 하면서 아빠보다 먼저 경북 영천으로 내려가 터를 잡았다. 작은 텃밭이 있는 집으로 가구가 열 가구도 안 되는 동네다. 그곳에서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전화도 잘 안된다. 어쩌다 전화를 받으면 뒷산에서 도토리를 줍는다거나 꽃밭 가꾸느라 바쁘다고 끊어버린다. 그것도 아니면 참선을 하거나 불경 외운다고 아예 받지도 않는다.'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의 자연인이 된 듯했다.


독립하던 날 엄마는 내게 엄마가 입던 근사한 옷들을 모두 내주었다. 깔끔한 블라우스와 각 선 바지와 단정한 H 라인 스커트가 한 아름이었다. 몸에 적당히 타이트하게 맞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도 꽤 되었고, 모피코트와 살짝 해져서 더 멋스러운 청바지까지 고루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투명한 봉투 두 자루에 엄마 옷들이 그득히 담겨 있었다.


"이걸 다 나 준다고?"

"뭐 줄 건 없고, 엄마가 주는 독립 선물이다."


의아했다. 도시녀로 멋부리며 살기 좋아하던 엄마가 깡촌 시골로 내려가 터를 잡겠다는 것도 신기했는데, 애지중지하던 옷들까지 다 내어준다니. 가정에서 독립해 절에 들어가 불경 공부나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이긴 했지만, 도시녀로 잘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 엄마였기에 흘려듣던 나였다. 엄마는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는 사람 같았다.


그렇게 엄마가 준 옷들을 바리바리 싸 들고 1.5룸 오피스텔로 독립을 하고, 얼마 후에는 엄마도 영천에 내려가 살기 시작했다. 엄마를 보러 영천 집 마당에 당도했을 때, 나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어디에서 샀는지 정비사들이나 입는 오버롤 점프슈트를 입고 막창을 구울 준비에 한창이었다. 머리카락은 염색을 하지 않아 뿌리 부분이 하얗게 올라와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풀어놓기도 전에 막창부터 먹기 시작했다. 숯불에 구운 막창이 잘 익어 맛있었다. 막창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 정비사 옷은 대체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영천 시장에서 샀다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시골 사람 다 됐네, 울 엄마."

"작업하기에는 이 옷이 딱이야."

"뭐 필요한 거는 없어?"

"이 시골에서 필요할 게 뭐 있겄냐. 좋은 거 다 너 해라. 엄마는 지금이 따악 좋아."


내게 막창을 구워주고 집으로 들어가 씻고 나온 엄마는 목 늘어진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엄마의 낯선 모습은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다만 내게는 그 모습이 조금 서글프게 느껴졌다. 가정에서 독립한 엄마의 모습에 기뻐하고 축하해줘야 하는데, 이 시골에서 엄마는 더 빨리 늙어갈 것만 같았다. 세련된 도시 아줌마에서 돌연 시골 할머니가 되어버린 엄마. 나는 그런 엄마와 생경스럽게 마주하다 서울로 올라와 다시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늙어가는 만큼 내게는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동료들과 회사 빌딩 1층 카페에 갔다. 커피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로 돌아오자 한 동료가 알은체 하듯 말했다. 오늘 옷이 참 멋스럽다고, 내게 잘 맞는다고 말이다. 나는 씨익 웃으며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아, 이거..."


다른 때처럼 우리 엄마 옷이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가 않았다. 서른한 살의 내가 서른한 살의 엄마와 예순네 살의 엄마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이 옷을 나보다 멋스럽게 소화했을 서른한 살의 엄마가 보고 싶어지는, 그런 순간이었다.




시골은 뭐 그렇게 할 일이 많은지. 페인트칠하랴, 나무 손질하랴, 텃밭 가꾸랴, 꽃밭까지... 엄마는 그 자연 속에서도 도시에 살던 시절 못지않게 바쁘게 지내는 것 같아요. 한편으론 왜 그 시골까지 내려가서도 좀체 쉬지를 않는지, 가끔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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