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도 남편인 뚱목이가 늦는다. 지금쯤 친구들과 술 한잔하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고 있을 터이다. 뚱목이는 친구들 이야기를 할 때, 그깟 놈들이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다. 하루는 뚱목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느라 장을 보는데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식들한테 돈 쓰는 거 아까운데" 나는 피식 비웃고는 요리할 재료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정작 친구들이 오자 가장 바쁜 건 뚱목이였다. 그날 메뉴는 배달된 족발과 내가 손수 만든 부대찌개와 김치전이었는데, 뚱목이는 친구들한테 라면 사리를 덜어주고 김치전에 오징어 좀 골라 먹으라고 잔소리하느라 분주했다. 개중 치즈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낙타, 왜 많이 안 먹냐? 맞다. 너 치즈 좋아하지. 피자 콜?"을 외치더니 피자와 치즈 볼로네즈 파스타를 주문했다. 다 같이 술집에 갔을 적에도 안주 시킬 때는 누가 뭘 좋아하는지 또는 먹고 싶은지 확인한 다음 시켰고, 안주가 나오면 애들 먹을 거 챙기느라 바쁜 엄마 같았다.
나와 결혼하기 전에는 일주일에 다섯 번씩도 만난 동네 친구들을 어머님은 '갈산동 촌놈들'이라고 불렀다. 서로 누가 더 초췌하게 나오는지 배틀을 벌이며 동네 술집에서 만났다고 한다. 어쩌다 빼입고 나온 놈이 있으면 놀려댔다는데, 내가 보기엔 그게 놀릴 일이라는 게 더 웃겼다. 촌놈들은 촌놈들이구나 싶었다.
친구들은 뚱목이가 나와 결혼하자 술친구가 하나 줄었다는 생각에 허전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일주일 다섯 번 만남에 두세 번 나오는 놈도 있는 반면 다섯 번 다 나오는 놈이 있는데, 뚱목이가 매번 나와있는 놈이었다. 막상 결혼을 했는데도 잘만 술자리에 나오는 뚱목이에게 친구들이 말했다. 누나는 괜찮냐고 말이다.
뚱목이는 술자리에서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오히려 집에 혼자 있는 내가 연락이 잘 안된다. 뚱목이가 술 마시러 나가면 나는 조용한 집에서 홀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그 시간에는 핸드폰을 안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뚱목이한테서 전화가 오면 낮은 목소리로 받는다. "나 집중하고 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애들이랑 놀아." 그런 나를 보고 뚱목이 친구들은 누나 성격 참 좋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는데,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남편이 가지고 있을 술자리에 크게 마음이 쓰이지 않아서 그런다.
내가 연락에 크게 개의치 않는 이유는 순전히 우리 엄마 덕분이다. 「내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투명했었다는 사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엄마는 주당이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특히 많이 마시고 다녔다. 고3인 오빠가 집 앞 호프집 아주머니 연락을 받고 달려나가 업고 오기도 했다. 엄마는 술 마시면 연락이 잘 안됐다. 핸드폰을 방치해두는 스타일이라 원체 연락이 잘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술을 마시면 더했다.
하루는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거실로 나갔는데, 아부지가 식탁 의자에 앉아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밤 12시였다. 보나 마나 엄마가 또 연락이 안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나는 아부지 옆에 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받을 리가 없지만 같이 전화라도 해주면 아부지의 초조한 마음이 덜어질 것 같아서 그랬다. 그러다 졸려서 잠이 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부엌으로 나가보니 엄마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찌개를 데우고 있었다. 아부지는 이미 출근한 후였다. 나는 식탁에 앉으며 엄마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엄마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 술 마시면 우리 생각은 나지도 않나보지? 아빠가 어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긴 아냐고." 엄마는 다 데운 찌개를 내 앞에 갖다 놓으며 대답했는데, 대략 이런 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은빈아, 사랑하는 일과 술 마시는 일은 별개의 성질이다. 엄마는 물론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만,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술자리가 즐거워서 그 자리에 빠져있다 보니, 엄마가 핸드폰을 잘 보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엄마는 바로 집 앞 지척에 있는 호프집이었고, 너네는 집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법이다. 너도 훗날 결혼해서 남편이 술 마시느라 연락이 안 된다고 널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안 된다."
어린 나이에도 기가 차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말문이 막힌 나는 무슨 개똥철학이냐고 구시렁대다 밥이나 먹었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무뎌졌다. 술자리에 가서 연락이 없으면 그래, 재밌나 보다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엄마는 술 취해도 별 탈 없이 집에는 잘 들어왔으니까 큰 걱정을 안 하게 되기도 했다.
남편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다. 소주 한 잔이 당긴다고 술 못 마시는 나를 앞에 두고는 혼자 한 병을 뚝딱 마신다. 어쩔 때는 나도 같이 술잔을 기울여주고 싶은데, 술이 받는 체질이 아니라 소주잔에는 영 손이 안 간다. 그런 남편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선 즐겁게 술잔을 쨍하고 부딪히며 마실 테니, 친구들 안주까지 살뜰하게 챙기며 그 시간을 만끽할 테니, 술자리에 가는 남편 등을 기꺼이 떠민다.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듣는데 마침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술잔 기울이며 시답잖은 농담 따먹기 좋아하는 남자가 결혼하고 보니 그 상대가 여자고,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여자가 결혼해서 보니 그 상대가 고작 남자라는 말이었다. 나도 언니들이나 친구와 만나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두세 시간은 거뜬히 넘게 수다를 떤다. 커피는 일찍이 동나 메마른 목을 적실 물이나 떠온다. 뚱목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카페에서 여자친구들과 수다 떠는 것처럼은 해보지 않았다. 그다지 해볼 생각도 없다. 여자들의 끝이 없는 수다는 여자들과 하는 것이어서 재밌는 법이니까.
지난 주말에는 엄마에게 소주 한 잔 따르던 뚱목이가 대뜸 말했다. "장모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은빈이 교육을 잘 시켜주셔서... 친구들이 저를 부러워해요." 이쯤에서 아부지 입장을 들어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어찌 됐든 분위기가 훈훈해서 우리는 웃어넘겼다. 오늘 밤에 나는 엄마의 가르침대로 먼저 잠자리에 들지 싶다. 나의 잠자리와 뚱목이의 술자리가 공존하는 신혼이다.
술 안 마시는 사람은 술 마시는 사람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술 마시는 사람이나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이나 "그놈의 술"이라고 말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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