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집 앞에 있어 자주 들르기에 익숙한 카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나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먼지가 차분히 내려앉는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마음이 너무 울뚝불뚝했다.
상사 때문에 직장을 그만뒀다는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런 친구들의 회사 이야기를 들을 때면 세상에 정말 각양각색으로 별난 사람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줄곧 잘 들어주다가도 때때로 거짓말 좀 하지 말라고 야유를 했다. 믿기 어려워서 그랬다. 그리고 요즘엔 내 친구들이 나한테 그렇게 말한다. "야야, 너 과장이 좀 심하다?" 나는 그러면 더 열이 받아서 얼굴까지 붉히며 토로한다. 애들은 그제서야 "그래, 네가 요즘 상사 스트레스가 많네... 그래도 뭐 어쩌겠냐."라고 받아준다. 그래, 진짜 뭐 어쩌겠는가. 어찌할 도리는 없다. 그래서 너네도 그만둔 거구나.
아직 참을만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내가 그만두기에는 분하다. 상사가 싫다고 내가 애정하는 비행과 비행에서 만나는 승객들까지 내치기에는 억울하고 아깝다. 게다가 내가 왜 매달 들어오는 그 좋은 월급을 상사 하나 때문에 날려보내야 하는가? 역시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이 괴로운 마음을 방치해둘 수는 없으니 대책으로 편안한 카페에 앉아 속이나 삭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이 차분해지면 책을 펼친다. 그렇게 해서 읽은 책이 채사장의 『열한 계단』이다.
채사장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으로 교양 인문학의 정점을 찍었다. 수천 권의 책을 읽고 사유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관점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다. 그런 그가 쓴 인문 에세이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일 것 같았다. 시중에는 직장 생활 어쩌구, 직장 상사 저쩌구 같은 책이 많았지만 언뜻 봐도 너무 단순하고 직설적이어서 더 와닿지 않았다. 나는 채사장에 대한 믿음으로 카페에서 책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읽을수록 더 와닿지 않은 건 오히려 채사장의 말이었다. 채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에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 내면의 투영입니다. 물질세계도, 사후세계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나의 내적 세계와 외부의 현상 세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ㅡ『열한 계단의 열 번째 계단』에서
채사장은 인간을 보는 존재, 즉 관조자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이 본다는 행위는 꼭 눈이 없어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눈을 감아도, 꿈을 꿔도 본다. 그래서 본다는 행위는 눈이라는 감각과 동일하지 않으며 외부 세계의 실재와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결국 실제로 존재하는 건 관조하는 주체로서의 나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 나뿐이지. 내 눈앞의 세계가 실제로는 내 내면의 세계...라고? 그러면 그 상사까지 내 내면의 세계라고? 그건 아니지. 뭐야, 이 양반. 그 사람이랑 나는 완전히 결이 다른 존재지.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싶어 다시 보려다가도, '그것은 하나입니다'라는 말에서조차 기분이 나빠져버려 책을 덮었다. 하나일 수 없었다. 하나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꾸역꾸역 마지막까지 읽어야 하는 성미 덕분에 며칠에 걸쳐 마저 읽었다. 다 읽고나서 보니 정신이 깨어나게 해주는 사상이 많은 책이었다. 특히 니체의 영원회귀론이 그랬다.
"니체는 하나의 세계를 더 제시한다. 영원하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세계. 예를 들어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당신은 대입시험을 치르고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늙어서 죽게 될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영원회귀에 따르면 당신은 어떠한 변화도 없이 자신의 삶을 반복하게 된다. 다시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대입시험을 치르고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늙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ㅡ『열한 계단의 네 번째 계단』
니체의 영원회귀론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나는 1989년에 태어나 승무원으로 취직하고 결혼을 하겠다. 아니지, 1989년에 태어나 승무원으로 취직하고 결혼하고, 상사 앞에만 가면 증오하는 마음에 손가락 끝이 저리고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얼굴에 경련이 일겠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영원히 반복한다. 채사장은 이렇게도 말했다. "찰나의 순간은 무한히 중첩된 내 삶의 한 지점을 강하게 꿰뚫고 있었다." 미운 상사를 미워하지 않을 도리야 없겠지만, 이 미워하는 감정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불교 공부를 하는 엄마는 전화 통화에서 보살님이 할 법한 고운 말을 해주었다. "다 네 마음에서 비롯되는 거다, 모든 것은 다 흘러가고 지나가고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여기서 미운 마음을 끊어내지 못하면 너는 어딜 가서든 그 미운 마음이 또 고개를 들 것이다..." 엄마가 하는 말은 듣기가 싫었다. 분명 좋은 말임을 알고 있는데도 나는 건성으로 들으며 대답했다. 핸드폰 너머 건성으로 듣고 있을 내 모습까지 아는 엄마는 또또또 건성으로 듣지 말라 했고, 그럼 나는 이제 짜증을 냈다. "아, 그걸 누가 몰라! 그게 어려워서 그러지!"
채사장의 책과 엄마가 해주는 말은 상통하는 부분이 많았다. 얼마 전 라디오스타에 나온 박혜미가 하는 말도 내겐 꽤 충격이었다. 이혼과 더불어 여러 문제를 책임진 박혜미는 이렇게 말했다. "남 탓을 하면 내가 너무 힘들어요. 그냥 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제 저는 앞으로의 상황만 봐요. 능력 있잖아요." 남편 탓, 남 탓을 할 만도 한데,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는데도 박혜미는 다 내 탓이라고 했다. 그 속내까지야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박혜미는 분명 크고 넓은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고 헤아릴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것은 하나입니다'라던가, '다 내 탓입니다'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대신에 엄마가 해준 말 중에서 그나마 따르기 쉬운 마음가짐이 있어 채택했다. 엄마는 도 닦는 일이 어디 산에 들어가 속세를 멀리하며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상사를 대하는 일이 바로 도 닦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참수행이니, 너는 일상에서 도를 닦고 있다고. 그래서 그 미운 상사를 오히려 부처로 생각하고 또 어쩌고 저쩌고~ 거기서부터는 따르지 못하겠고, 그냥 딱 도를 닦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를 닦고 난 이후에는 어떤 마음이 일어날까. 그건 그때가 되어서 또 써보겠다.
어쩌면 나 같은 범인은 평생 이 굴레에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오늘도 책을 읽고, 좋은 말씀을 들으며, 울뚝불뚝한 마음을 둥글게 만들고자 조금씩 조금씩 애쓴다.
세상에 좋은 말은 너무 많잖아요. 결국에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말만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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