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생각
취미로 사진을 찍는 친구가 있다. 곧 본업을 잠시 멀리하고 전문적인 공부를 한다고 하니 취미가 아닐 수 있겠다. 어려서부터 의지가 강했고,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 주저하지 않던 친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친구가 참 멋있었다. 그 친구와 달리 나는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어떤 일이든 주저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욱 그 친구의 말과 행동이 멋있고 그 친구가 좋았다.
그 친구가 한두 해 전 나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입문용으로 샀던 카메라에서 더 좋은 카메라로 넘어가려는데, 중고 시장에 내놓기 전에 원하면 싸게 넘기겠다고 했다. 나는 원래 사진을 즐기지 않는다. 남이 나를 찍는 것은 그 자체로 부담스럽고 또 내가 남을 찍어주겠다는 말을 건네는 것도 부담스럽다. 근데 친구의 모습이 멋있었는지 카메라가 멋있었는지 친구가 건넨 카메라를 덥석 그것도 적잖은 돈을 주고받았다. (중고 가격보다 훨씬 쌌지만, 카메라는 카메라였다) 동경과 일상이 가만히 흘러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어우러져 나를 움직였던 것 같다.
막상 카메라를 나에게 넘길 때 친구는 애틋하였다. 카메라를 한참 동안 구석구석 꼼꼼히 청소하였고, 또 한참을 관리하는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참고로 사진을 찍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자연스레 카메라를 자주 들고 다니게 되었고 지금은 가족이나 회사에 행사가 있다면 매번 불려 가서 셔터를 누른다.
친구의 집과 우리 집이 거리가 있어 같이 사진 찍을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함께 사진을 찍으러 가자고 했다. 무한도전을 보다가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고 했다. 다만 내가 사는 곳에서 멀어서 걱정이지만 그래도 오면 꼭 좋아할 거라고 했다. 멀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곳 그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회현 시민아파트였다.
어렴풋이 무한도전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서울에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할 낡은 아파트에서 출연자들이 뛰어다니는 장면이다. 그 방송에서는 연예인 아파트라는 힌트로 나왔던 것 같다.
회현역에서 회현 시민아파트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언덕이었다. 웬만한 차로도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싶었다. 골목길이 사방팔방으로 이어져 길을 찾기도 어려웠다. 골목 끝까지 가다가 돌아오기를 두어 번 결국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았다.
회현 시민아파트는 거대했다. 아파트 크기가 엄청났다. 지대가 낮아 눈높이에서 보이는 건물이 절반이었는데도 그 반으로도 충분히 컸다. 지어진 시기를 생각하면 이렇게 높은 언덕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생겼나 싶다. 겉은 무한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많이 낡아 있었다. 시멘트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얼룩덜룩하였고 지금 아파트에는 볼 수 없는 철제 구조물은 위태로워 보였다. 중간중간 창문 유리가 깨지거나 아예 없어 안의 쓰레기들이 훤히 보이기도 하였다. 십 년 전 홍콩에서 보았던 청킹맨션이 생각났다. 그나마 아직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띄엄띄엄 눈에 확 띄는 흰 판이 있었다.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고 레트로 유행까지 더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안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중정이 있는 특이한 구조였기 때문에 다행히 중정으로는 갈 수 있었다. 말이 중정이지 관리 안 되고 망가진 채 버려진 놀이기구들로 DMZ가 떠올랐다. 긴 계단을 내려오면서 친구가 이 땅은 서울시 소유기 때문에 시민의 공간으로 우리도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회현 시민아파트는 시 소유의 대지에 지은 아파트다. 난립한 무허가 건물을 정리하고 무허가 건물에 살던 이주민을 위한 아파트가 시민아파트였다.
시민아파트는 시민아파트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였을까?
소외되었던 이주민을 위한 공간이 그 당시 제대로 지어졌을 리 없었다. 많은 사고가 있었고 기어이 마포에 있던 와우 시민아파트가 붕괴가 되었다. 와우 시민아파트가 붕괴하면서 시민아파트의 부실 공사가 온 세상에 알려진 그때 회현 시민아파트는 지어지고 있었다. 감시하는 눈이 생겨 회현 시민아파트는 튼튼하게 짓게 되고 시범아파트라는 이름으로 세탁하였다. 시민아파트가 시범아파트가 되면서 그 가치가 올랐다. 당장 갈 공간이 없던 이주민은 입주권을 부유한 사람들에게 넘기게 되었고 시민아파트에는 시범아파트에 이어 연예인 아파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기 뜻과 상관없이 삶의 터를 잃었던 이주민은 삶과 바꾼 작은 권리마저 행사하지 못하였다. 지금의 회현 시민아파트는 연예인 아파트에서 다시 시민아파트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회현 시민아파트는 과거의 화려한 수식어는 없다. 대부분 텅 빈 집들과 한적한 텅 빔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몇몇 시민이 있을 뿐이다. 돌고 돌아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온 그 아파트는 원래의 이름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회현 시민아파트와 비슷한 역사를 가진 홍콩의 청킹맨션은 최근 리모델링을 했다. 깨끗하고 반듯한 모습이다. 회현 시민아파트도 앞으로 리모델링으로 가구를 줄이고 창작자를 위한 공간으로 만든다고 한다. 마무리되지 않은 입주민에 대한 보상과 진정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할 회현 시민아파트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