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의 정확한 정의를 다시 묻다

Discussing the Precise Definition of Sex

by 지누리즘

우리는 너무 적은 정보로 평생을 살아왔다
우리는 몸을 너무 늦게 배웠다.
그리고 섹스는 대부분 “사랑”이 아니라 “오해”로 시작된다.
그 오해는 말이 아니라, 침묵과 첫 경험과 금지된 시선 속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시선은 다시 사상이 되고, 인식이 되고, 평생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시야로 성을 바라보고, 섹스를 판단하며 살아간다.


아주 좁은 경험, 아주 제한된 정보, 아주 편협한 문화 속에서 형성된 감각으로 말이다.
한국 사회라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성을 자연스럽게 배우기보다
먼저 숨기는 법을 배우고,
느끼기보다 억누르는 법을 먼저 익혀왔다.


그 결과 성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금기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이 글 역시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읽힐 수 있다.
어떤 장면이나 표현은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저자 역시 이 모든 것을 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 대부분은 제한된 경험과 제한된 언어 속에서 이 영역을 이해하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 글은 단정이 아니라 질문에서 시작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
지금 우리가 경험해온 섹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학습된 편견일까.


섹스란 무엇인가.
번식.
쾌락.
남녀 사이의 행위.
혹은 결혼 이후의 의무.
이 정도로 정리되는 순간 섹스는 이미 인간의 삶에서 분리된다.
그리고 기능이 된다.

사용되는 것, 소비되는 것, 혹은 통제되는 것.
하지만 이 축소된 정의 자체가 문제의 시작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너무 좁은 좌표에서 성을 배웠다.
무엇인가 깊은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에 대해 충분히 배운 적이 없다.
어릴 때의 환경,
침묵 중심의 문화,
금지 위주의 성교육,
혹은 아예 부재한 교육.
그 사이에서 우리는 단편적인 정보만 흡수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이 평생의 세계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성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오해의 축적이 된다.
각자의 경험은 너무 적고, 너무 파편적이다.
그 적은 정보가 평생의 판단 기준이 된다.
우리는 제한된 이해로 훨씬 큰 세계를 판단하며 살아간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태도처럼
“모른다는 자각이 오히려 시작일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이해 범위를 충분히 확장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성을 아는 것이 아니라 좁게 경험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첫 경험은 시작이 아니다.
인식의 각인이다.
누군가에게는 기대였고,
누군가에게는 혼란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공허였고,
누군가에게는 침묵이었고,
누군가에게는 강압과 침해의 기억이었다.


성폭력이나 동의가 무너진 경험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이후의 모든 관계 해석을 바꿔버리는 구조가 된다.
정리되지 않은 경험은
섹스를 현재의 행위가 아니라
과거 감정의 반복 재생으로 만든다.


우리는 성교육이 아니라 금지를 배웠다.
성교육은 기능 중심으로 존재해왔다.
임신, 질병, 예방, 위험.
하지만 정작 빠져 있는 것이 있다.


욕망은 왜 생기는가.
몸은 왜 반응하는가.
쾌락은 왜 존재하는가.
동의는 무엇인가.
관계 속 감정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이 질문이 빠진 상태에서 우리는 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해 두려워하는 법만 배운다.

남성과 여성에게 주입된 규칙은 완전히 다르다.


남자에게는
경험해야 한다.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속궁합을 봐야 한다.


여자에게는 반대로
밝히지 마라.
욕망을 숨겨라.
조신해야 한다.
통제해야 한다.


같은 인간에게 적용된 기준이 다르다.
이 비대칭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다.
그리고 이 구조는 관계를 직접적으로 왜곡한다.
남성은 성을 경험보다 소비로 이해하기 쉬워지고
여성은 욕망 자체를 억압하게 된다.


결국 남성은 쉽게 접근하고
여성은 방어적으로 닫히고
그 사이에는 오해만 쌓인다.
여기에 종교와 도덕이 더해진다.


성은 죄라고 말하고
욕망은 통제하라고 말하고
몸은 숨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는 성을 끊임없이 노출시키고 소비한다.
이 모순 속에서 사람은 외부 규범보다 더 강한 구조를 만든다.
바로 자기 검열이다.
“이건 하면 안 된다.”
“이건 이상하다.”
“나는 왜 이럴까.”


이 순간부터 사람은 몸을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몸을 감시하는 존재가 된다.
이 구조의 결과는 명확하다.
성은 자연이 아니라 금기가 된다.
이해가 아니라 불편이 된다.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를 바꿔 반복된다.


관계는 감각이 아니라 기능이 되고
쾌락은 교감이 아니라 습관이 되고
섹스는 만남이 아니라 반복이 된다.
연인과 부부 관계에서는 또 다른 구조가 나타난다.


초기에는 강한 생화학적 반응이 존재한다.
도파민, 옥시토신, 엔돌핀 같은 물질들이
강한 끌림과 몰입을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강도는 자연스럽게 감소한다.
여기서 관계는 갈라진다.
어떤 관계는 이것을 변화로 이해하고
어떤 관계는 감소로 해석한다.
감소로 해석되는 순간 문제는 시작된다.

권태, 거리감, 불만이 발생하고
외부 대상에 대한 시선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때 배우자의 질투와 비난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왜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냐.”


이 감정 자체는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관계를 결정한다.
비난과 통제는 관계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밀어낸다.


붙잡으려는 압박 → 숨 막힘
숨 막힘 → 거리감 증가
거리감 → 외부 시선 증가


결국 관계를 지키려는 행동이
관계를 가속적으로 무너뜨리는 구조가 된다.


다만 이것은 섹스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성격, 소통 방식, 삶의 스트레스가 함께 얽혀 있다.
하지만 여전히 빠져 있는 것이 있다.


욕망은 왜 생기는가.
몸은 왜 반응하는가.


이 질문을 가장 깊게 탐구해온 흐름 중 하나가 정신분석학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무의식과 성적 충동이 인간 정신 구조의 핵심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의 이론은 논쟁적이었지만, 성을 단순한 행위가 아닌 인간 심리의 중심 축으로 끌어올렸다.


칼 융(Carl Jung)은 개인 무의식을 넘어 집단 무의식을 통해 인간 욕망이 문화와 상징 속에서 작동함을 설명했다.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는 억압된 성적 에너지가 신체와 심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성은 단순한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전체를 관통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조차 성을 “정답”으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층위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연구는 성을 닫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지평으로 확장시킨 계기였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정보로 살아간다.
각자의 인식은 제한되어 있고
그 제한된 정보로 세계를 판단한다.


그래서 성에 대한 이해도 결국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이 영역을 완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대부분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아는 척이 아니라
모름을 인정하고 확장하려는 태도다.


결국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섹스를 정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섹스를 다시 넓게 보기 시작하자는 것이다.


억압이 아니라 자연으로,
금기가 아니라 관계로,
통제가 아니라 이해로.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는 섹스를 경험하고 있다고, 또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서로를 오해한 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려는 태도,

그리고 한쪽으로 고정되지 않은 다각적인 이해를 위해 지속적으로 사유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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