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인생의 선이 이어졌다

by 언어프로듀서


제주 올레 9코스 어딘가였다. 숨이 차올라 잠시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저 아래 제주 밭과 집들이 작게 보였다.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내 발로 왔구나.'

그 순간,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제주 올레 걷는 일을 사랑한다. 3년 전, '5년 안에 걸어서 제주 한 바퀴'라는 목표를 세웠다.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워킹맘의 현실을 반영한 여유로운 기한이었다. 직장과 육아로 자주 제주를 찾을 수 없었기에 스스로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 것이다.


일 년에 두세 번,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올레길을 찾았다. 한 번 내려갈 때 두세 코스를 연달아 걸었고, 어떤 날은 한 코스만 걷고 돌아왔다. 비가 와서 중단한 적도 있고, 너무 더워서 그늘 아래 주저앉아 한참을 쉬기도 했다. 완벽하지 않은, 느릿느릿한 여정이었다.


그런데 올해 5월, 놀랍게도 목표를 달성했다.

올레 1코스부터 21코스까지, 제주 내륙으로 이어진 연결 코스를 모두 걸었다. 완주는 아니지만, '걸어서 제주 한 바퀴'라는 처음 그 약속을 지켰다. 당초 계획보다 2년이나 앞당겨진 결과였다.


무엇보다 뿌듯한 건, 올해 <마흔, 제주 올레를 만날 시간>이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이다. 완주 후에 쓴 책이 아니라, 걷는 중에 쓴 책이었다. 길 위에서 만난 생각들, 올레가 내게 건넨 질문들, 그 여정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나를 기록하고 싶었다.


책을 읽은 분들이 "올레를 떠나고 싶어 졌다"라고 말해줄 때마다 신기했다. 내가 걸었던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떠나고 싶은 곳이 되었고 나의 작은 점들이 누군가가의 첫 점이 되었다.



완성은 아니지만, 올레를 걸은 경험은 내 인생의 분명한 점 하나가 되었다. 작은 목표를 차곡차곡 쌓아 이뤄낸 성취감이 참 기뻤다. 큰 목표는 멀게 느껴져 중간에 지치기 쉽지만, 작은 목표는 비교적 빠르게 이룰 수 있고 그 성취감이 또 다른 동력이 된다.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해냈다.'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작은 성취는 스스로를 인정하게 만든다. 삶에 긍정적인 기운을 채워준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라는 점을 찍었으니, 곧 '제주 올레 완주'라는 점도 분명히 찍게 될 것이다. 그렇게 평범한 작은 점들이 어느 날 하나의 연결된 선이 되어, 내 삶의 근사한 길을 만들어줄 거라 믿는다.


⭐️점을 잇는 것, Connecting the Dots. 어렵고 힘들고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을 이어갈 때 평범해 보이던 것(anything)이 특별한 무엇(something)이 된다. - <스몰 스텝> 박요한 -



"주구장창 걸어서 뭐 해? 다리만 아프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처음엔 그저 무의미해 보이는 것(nothing)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올레 걷기(anything)를 통해, 나는 '걸어서 제주 한 바퀴'라는 특별한 성취(something)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책도 썼고, 누군가에게 영감도 주었다. 이렇게 하나씩 이뤄가는 과정이 삶을 더 즐겁게 만든다는 걸 배웠다.




오늘,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하루라도 괜찮다. 하얀 도화지 위에 무엇이든 하나 찍어보자. 퇴근길에 계단을 걸어 올라가도 좋고, 미루던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도 좋다.


그 작은 점들이 모여 성취감을 만들고,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내가 왔구나" 말할 수 있는 길이 될 테니까.


우리만의 인생의 선은 그렇게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