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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h My Today Nov 21. 2022

최악의 상사를 만났다

조용한 사직의 시작

조직을 옮겼다.


더 이상 매출과 숫자의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부서명만 들어도 기술의 발전의 코어에 있는 곳이다.


그런데 옮기기 전에 무수히 많은 말을 들었다.


- 이 부서로 가려고 합니다.

- 너 마음은 알겠는데, 거기는 지뢰가 있어.


- 알고 있어요.


알고 밟아도 지뢰는 지뢰다  


처음 한 달은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렇게 특이한 임원이 있구나,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이렇게 하고서도 임원이 되는구나, 회사는 정말 빈이 많은 곳이구나.

이런 깨달음을 날마다 하나 이상씩 배웠다.


깨달음이 있으면 나아져야 할 텐데, 나의 하루는 더 나빠졌다. 


새로운 조직은 나를 모른다. 증명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게 문제 된 적은 없었다.


내가 이직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실패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늘 빠르게 적응했고 성과를 냈고 인정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내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걸.


내 일을 알아보고, 인정해 주고, 이끌어주는 임원을 지금까지 만나왔다.


회사 생활의 퀄리티를 결정하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운이 상사 운이다.


이 운이 없었던 올해, 이런 게 회사생활일 수 있구나, 이렇게 괴로울 수 있는 게 직장생활이구나 배웠다.


최악의 상사, Worst 3을 꼽아보자.


1. 구성원을 자신의 지식인으로 쓴다. 네이버 지식인처럼 그때 그때 자기가 궁금한 내용으로 프로젝트를 만든다. 열심히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면 어느새 임원의 관심이 식어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더 이성 필요 없어진다.


2. 감정 기복이 심하다. 몸도 매일 잔잔하게 여기저기 아프고,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들쑥날쑥 하다. 어제 꿈을 잘 못 꿔서 발차기하다 다쳤어요. 찬 거 많이 먹어서 배가 아파요. 부동산 일 처리하러 바쁩니다. 그룹 단체 창에는 늘 임원의 이상한 근태가 올라온다.


마지막이 킬포다.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3. 보고서에 집착한다. 행간과 글자 크기, 글틀, 컬러 팔레트... 내용은 똑같은데 보고서 형식만 계속해서 바꾼다. 실행 중심으로 속도 낸 성과 지향적인 나와는 너무 다르다.


론 나와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긍정적으로만 보려면, 그래. 이 사람도 뭔가 괜찮은 구석이 있으니 임원씩이나 된 거겠지 생각해본다.


위의 세 가지 워스트 포인트를 다 갖추어도, 그 사람은 상사 운이 있었겠지. 운도 능력이라는데 나에게 없는 능력이 그 에게는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22년을 보내면서 운에 더해 나에게 부족한 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


이곳은 스탭 조직입니다. 여기서는 보고서가 가장 중요해요.


그렇다. 이것은 임원을 잘못 만난 내 운이 안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성향과 맞지 않은 조직을 선택한 내 결정 탓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행 중심으로 10년 넘는 커리어를 쌓아왔으면서, 조직 변경을 할 때 스탭 조직으로 오다니.

열심히 달리고 나서 겪은 작년의 배신이랄까, 임원과 회사에 대한 실망이 몰고 온 건 섣부른 결정이었다.

나한테 이랬겠다, 나 어디 가도 잘하는 사람이거든.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조직 변경이 잘못된 선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조직을 떠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고 존중받지 않으면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 탓이라면 개선의 여지도 나에게 있으니까. 개선되지 않으면 이런 회사 생활 더 이상은 못할 거 같으니까. 내가 살기 위해 바뀌기로 했다


워스트 쓰리콤보의 임원을 만난 건 행운이다.

이제 방향 전환이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회사 목표를 내 목표로, 회사 고과를 내 인생의 고과로 생각하고 앞만 보고 달렸겠지.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달릴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럴 마음과 자세가 회사생활 10년이 넘어서야, 이제야, 20년을 채우지 않은 지금 다행스럽게도 내게 생겼다.


그렇게 조용한 사직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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