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나를 가장 편하게 만들어준 것 중의 하나는
꼭 정해진 시간에 회사에 앉아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한때는 부정하려고 애썼지만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태생이 잠꾸러기에 저녁형 인간이다. 집 앞에 있던 초등학교에도 지각을 하고 기숙사 생활을 하던 대학에서 내가 취업을 한다고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회사에서 나는 규칙적으로 매일 20분씩 늦곤 했다. 후일 퇴사를 앞두고 동료 직원에게 들었는데 이런 내 꼴을 보다 못한 사장님께서 내 뒤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에게는 모두 매일 30분씩 일찍 출근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하셨었다고.
그나마 출퇴근 시간을 까다롭게 체크하지 않는 카카오로 이직한 후에는 출근 시간에 대한 압박에서 많이 벗어났다. 하지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고 싶으면 눕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라 했던가. 항상 출근하면 이미 자리에 앉아서 일에 몰두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무언의 압박을 받곤 했다. 아마 카카오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출퇴근이 자유로운 회사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최근에는 주 40시간만 채우면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유연 근무제도 도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캐나다에 와서 느낀 점. 아무도 내가 어디 있는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한테 물어볼 것이 있으면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내고, 좀 더 밀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면 Chime으로 전화를 걸어 이야기한다. 팀원들끼리 모여서 하는 회의도 1~2주에 한 번씩 전체 팀 미팅을 하는 것 외에는 콘퍼런스 콜로 참여가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다들 근무시간 중에 은행에 가거나 병원에 갈 일 있으면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고 어떤 날은 아예 재택근무를 한다고 팀에 공유하고 집에서 일하기도 한다. 누구는 집에 큰 택배가 오기로 해서 (캐나다는 한국처럼 경비실에서 모든 택배를 받아주지 않는다), 누군가는 가족이 아파서, 누군가는 학부모 모임에 참여해야 해서, 참 다양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재택근무를 사용하고, 심지어 왜인지도 묻지 않는다. 나에게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된다.
우리 팀의 시니어 엔지니어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로 (개인적인 이유라면 굳이 캐묻지 않는 것이 이곳의 문화다) 한 달간 유럽에 가서 일을 했다. 물론 유럽과는 8시간이 넘는 시차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조금 힘들었겠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들과 많은 커뮤니케이션을 필요로 하지 않는 프로젝트를 아예 혼자 맡아서 갔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니저에게 "원래 다들 이렇게 일하는 거야?" 물어보니 그 친구는 조금 특별한 경우고, 모든 경우에 다 허용이 되지는 않는다고. (우리 매니저가 좀 깐깐한 편인 것 같다)
9월에 여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재택근무를 쓰고, 가끔은 아침에 여름이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느지막이 출근한다. 여름이가 잠을 설친 다음 날이면 늦잠을 자서 아침에서야 "나 오늘 좀 늦어" "오늘 재택근무할게" 이야기하고 천천히 걸어서 출근한다.
오늘은 집에만 있던 와이프가 엄마들 모임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재택근무를 쓰고 점심때까지 일을 하다가, 와이프를 차로 데려다주고 나는 근처 카페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고 모임이 끝난 와이프와 여름이를 태워서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와이프가 나지막이 이야기했다. 나는 여기 와서 자기가 이렇게 나랑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아.
이제 태어난 지 80일 된 여름이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나고 얼굴도 변한다. 고구마같이 빨갛던 얼굴이 뽀얗게 변했고, 여태 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다가 이제 엄마 아빠 얼굴을 보면 함박웃음을 지으며 팔다리를 흔들 줄도 알고, 엄마가 앞에서 재롱을 떨면 다 큰 아이처럼 까르르 웃기도 한다.
일찍 회사에 간 날은 조금 더 빨리 여름이가 보고 싶은 날이 있다. 그럴 때는 그냥 적당히 일을 마치고 짐을 챙겨서 나온다. 집까지는 걸어서 15분이 걸린다. 집에 도착해서 예쁜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여름이가 잠들면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일찍 나와서 미처 못했던 일거리들을 처리한다.
만약 한국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9시에 집에서 나오고, 10시에 회사에 도착하고, 7시에 퇴근해서 8시에 집에 도착했다면 지금처럼 와이프와, 여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까? 아이가 이렇게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캐나다에 온 것을 감사해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