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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 journey Nov 23. 2022

지하주차장 소화전 앞 주차 무찌르기

애자일하게 법의 사각지대를 넘어보자, 그의 주차만큼은 못 참겠으니까.

이런, 또 그다. 그의 차는 매번 지하 1층 주차장의 소화전 앞에서 만난다. 일면식도 없는 차주에게 이제는 미운 정도 붙을 지경이고 원치 않게 차 번호도 외워버렸다. 자고로 운전면허와 상식,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친구라면 소화전 앞에 주차하면 안 된다는 걸 알겠지만 한결같이 그곳에 주차한 걸로 미루어 보아 그에게 둘 중 하나는 없는 게 확실하다. 


아무래도 우리 동의 출입구와 소화전 앞 공간이 가깝기도 하니 먼 곳에 주차하기 귀찮은 마음에 그랬으리라. 그렇다고 배려해야 하나? 내가 바보라서 먼 곳에 주차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그가 더는 그곳에 주차하지 못하게 노력하기로 결심했다.




첫 번째 전략, 안전신문고를 통해 신고하기(결과: 실패)

백 번을 신고하면 한 번 정도는 받아주시려나?

지난 4월 26일과, 5월 7일에 해당 차량의 소화전 앞 주차 장면을 촬영해 두 차례에 걸쳐 신고했다. 며칠 뒤 두 신고 모두 '불수용' 처리를 받았는데, '도로가 아니라서'라는 엄청난 이유였다. 현행법상 도로가 아닌 곳이라면 소화전 앞에 주차했어도 과태료 처분 대상이 아니란다. 같은 지하주차장인데도 장애인 주차구역에 주차하면 불법인데, 소화전 앞 주차는 불법이 아니라니. 법이 너무 멋지당. 야생(?)의 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은 채, 패기와 열정만 갖고 덤빈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피지기 백전백승, 첫 번째 전략은 쿨하게 포기하고 일단 숨죽여 공부부터 하기로 했다.




두 번째 전략, 소화전 관련 법안 모두 스크랩하기(결과: 나름 성공)


법과 시행령의 문장을 볼수록 이해되는 건 1개인데, 질문은 3~4개로 늘어났다. 


"도로교통법에선 소방용수시설과 비상소화장치가 설치된 곳에 주차하지 말라는데, 그럼 '도로'란 뭐지?"

"잠깐만, 소화전은 비상소화장치에 해당이 되나?"

"피난시설, 방화구획, 방화시설 주위에 장애물이 있으면 안 된다는데 소화전은 여기에 해당이 안 되나?"

"소방시설이란 뭐지!?"


정리하면 소방시설은 5개의 설비로 나뉘는데 이중 소화설비란 단어에 '옥내소화전설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또는 관리 담당자)에게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지 있는지 보려면 '소방시설, 소화설비, 옥내소화전설비'란 단어를 찾으면 될 것이다. 다행히 3개의 소방 관련 법을 보면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몇 가지 재밌는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10조(피난시설, 방화구획 및 방화시설의 유지ㆍ관리)
① 특정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은 「건축법」 제49조에 따른 피난시설, 방화구획(防火區劃) 및 같은 법 제50조부터 제53조까지의 규정에 따른 방화벽, 내부 마감재료 등(이하 “방화시설”이라 한다)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1. 피난시설, 방화구획 및 방화시설을 폐쇄하거나 훼손하는 등의 행위
2. 피난시설, 방화구획 및 방화시설의 주위에 물건을 쌓아두거나 장애물을 설치하는 행위

▲위에서는 '소방시설, 소화설비, 옥내소화전설비'란 단어가 없으므로 소용이 없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9조(특정소방대상물에 설치하는 소방시설의 유지ㆍ관리 등)
① 특정소방대상물의 관계인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소방시설을 소방청장이 고시하는 화재안전기준에 따라 설치 또는 유지ㆍ관리하여야 한다. 이 경우 「장애인ㆍ노인ㆍ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2조제1호에 따른 장애인 등이 사용하는 소방시설(경보설비 및 피난구조설비를 말한다)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장애인 등에 적합하게 설치 또는 유지ㆍ관리하여야 한다. <개정 2014. 1. 7., 2014. 11. 19., 2015. 1. 20., 2016. 1. 27., 2017. 7. 26., 2018. 3. 27.>

② 소방본부장이나 소방서장은 제1항에 따른 소방시설이 제1항의 화재안전기준에 따라 설치 또는 유지ㆍ관리되어 있지 아니할 때에는 해당 특정소방대상물의 관계인에게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다. <개정 2014. 1. 7.>

▲위에서는 '소방시설의 화재안전기준을 지키지 않으면 소방서의 높으신 분이 관리 담당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옥내소화전설비의 화재안전기준'은 주로 배관, 제어반, 배선 등 그야말로 설치 기준을 명시하고 있어 거의 소용이 없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50조(벌칙)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3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2014. 1. 7., 2016. 1. 27.>

(중략) 6. 제20조 제8항을 위반하여 소방시설ㆍ피난시설ㆍ방화시설 및 방화구획 등이 법령에 위반된 것을 발견하였음에도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을 요구하지 아니한 소방안전관리자

▲위에서는 '제20조 제8항을 위반하면 시설의 소방안전관리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제20조 제8항을 봐야겠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제20조(특정소방대상물의 소방안전관리)

⑧ 소방안전관리자는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소방시설·피난시설·방화시설 및 방화구획 등이 법령에 위반된 것을 발견한 때에는 지체 없이 소방안전관리대상물의 관계인에게 소방대상물의 개수·이전·제거·수리 등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을 요구하여야 하며, 관계인이 시정하지 아니하는 경우 소방본부장 또는 소방서장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 이 경우 소방안전관리자는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그 업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개정 2016.1.27>

▲'지하주차장 소화전 앞에 주차하지 마!'라는 법령은 없지만 위의 내용에서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부분이 어쩌면 포인트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자, 이제 다시 신고하자!




세 번째 전략, 소방서 담당자와 전화하기(결과: 대성공)

11월 20일, 그가 마침 또 소화전 앞에 이면주차를 하고 있길래 안전신문고에 다시 신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방서의 조사관이 직접 전화를 걸어 내게 이것저것 묻고 현행 법령을 설명했다.


"주차한 분을 처벌하긴 어렵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리자를 처벌하기 원하시나요?"

"아뇨.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만 이번이 세 번째 신고인데, 이후에도 적절한 조치가 없어 같은 상황이 또 생기면 다음 신고에서는 관리자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5시간 뒤, 조사관은 내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결론은 조사관이 직접 아파트에 찾아가 소방안전관리자, 안전관리자, (그리고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전임 안전관리자를 불러 30분 동안 소방안전교육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후 관리자분들은 아래 사진처럼 곧바로 조치하셨다고.


Before: 그의 차가 소화전 앞에 이면주차한 모습 / After: 소화전 앞에 주차하지 못하도록 구조물을 설치했다.


아름답다. 소화전 앞에 설치된 두 개의 기둥을 얼른 보고 싶어 근무시간 내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는 이제 저곳에 주차하지 못한다. 만약 또 주차하면 차량 통행이 이전보다 훨씬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특히 나한테서) 욕을 실컷 먹을 것이다. 


연말을 맞이해 마음과 정성을 담아 그에게 꼭 상품권(과태료)을 보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 바람은 이루지 못했으나 이번 일을 계기로 지하주차장은 더욱 안전해졌고, 동시에 그곳이 불길에 휩싸일 위험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아파트의 소방안전관리자도 이참에 관련 시설을 전부 점검했으니 예기치 못한 화재 때문에 직업을 잃을 위험이 낮아진 거나 다름없다.


사실 이 정도로 이 문제에 집착하고 싶지 않았는데, 오기가 생겨 얼떨결에 관련 법까지 익혔다. 손해 본 건 없는 것 같다.(헉, 혹시 그의 큰 그림..?!) 뭐, 그를 제외한 2,400세대 아파트 주민들도 더 편안해졌을 테고... 특별히 이번 일에 누구보다 심도 있게 관심을 가져준 수원남부소방서 조사관 선생님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아파트의 숨은 보안관을 자처하며 불의에 조용하고 확실하게 맞서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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