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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Apr 13. 2020

"너는 그렇게 떳떳해?" 동료가 물었다

'주변에 널린 일상의 울림을 통해 깨닫는 떳떳함도 있다'


떳떳-하다 [떧떠타다]  '굽힐 것이 없이 당당하다'    


기분 좋은 단어다. 비슷한 말로는 '어엿하다', '의연하다', '정당하다', '공정하다', '당당하다', '공명정대하다', '공명하다', '버젓하다', '정정당당하다'가 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듣고 또 읊었던 말인데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숱한 세월을 거치면서, 불편한 세상에 치여 살면서 뇌 한쪽 구석으로 밀어냈기 때문이 아닐까?


"너는 그렇게 떳떳해?"


동료가 내게 말했다. 회사 사람 욕, 회사 욕 좀 적당히 하라는 말을 던진 직후였. 그의 시종일관 반복되는 무거운 말 폭탄은 동료끼리 농담 반으로 던지는 콩알탄 같은 언어와는 사뭇 달랐다.


'너는 욕 안 하냐? 혼자 깨끗한 척하지 마라'라는 문장이 사내 메신저를 타고 바탕화면으로 흘러들었다. 공범이면서 이제 와서 발뺌한다는 분노를 충분히 머금고 있었. 부정하지는 않다. 하지만 동료들과 주고받는 새까만 말은 보통 동병상련의 이해를 통해 상쇄다. 이런 과정으로 조금이나마 화를 털어내면서 회사에 다니는 거.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는 일종의 위안다. 흡수할 수 없는 누군가의 검은 배설을 홀로 감내하는 상황과는 다르. 싫지 않은 사람 욕을 억지로 들어주는 것도 힘들고, 그만두지도 않을 회사가 싫다는 넋두리도 듣다 보면 지친다. 동료와 대화는 단절됐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떳떳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떳떳하지 못해서가 아다. 확신이 없어서일 뿐다. 잘살고 있는지, 못 살고 있는지, 대충 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 가끔 실눈 뜨고 고개 드는 악마 같은 속마음이 나인지, 직장에서의 가식적인 겉모습이 나인지 헷갈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 당당하게 떳떳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지만,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보였. '너는 떳떳하냐?'라는 말에 당당하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떳떳하지 못한 소식을 실시간으로 접한다. 사회의 부조리를 오감으로 부대끼고 분노하면서 살아간다. 직장이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간이 자동으로 접히는 불편하고 거북한 모습은 일상다반사. 한 동료가 이런 말을 했다.

 

"행복한 뉴스만 전하는 언론사는 없을까?"     


얼마나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재미없다', '의미 없다', '지겹다', '징그럽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 그런데 행복은 기쁨과 만족의 환호성 속에서만 느끼는 게 아니다. 주변에 널린 일상의 울림을 통해 깨닫기도 한다. 분노를 글로 삭이면, 그 분노가 행복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니까',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는 떳떳한 마음이 위안을 주고,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가 삶을 시나브로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


일상의 삐뚤어진 퍼즐 조각을 맞추는 즐거움을 통해 자신에게, 가족에게, 아이에게, 주변 사람에게, 세상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내 마음에 떳떳함을 장착할 수 있 아닐까. '떳떳함'은 거창하지 않다. 일상에 널린 작은 불편함을 개인적인 자정 작용으로 해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주변에 떳떳하지 못한 일들은 셀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떳떳함 장착 연습'을 더욱더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다.


이렇게 조금 더 괜찮은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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