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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an 14. 2020

어쩔 수 없이 착한 척 살아가는 평화주의자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저 나를 위한 친절이라는 걸'


친절한 편이다. 착해서가 아니다.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여서다. 누구와 다투거나 불편하게 지내는 걸 극도로 싫어해 착한 척하며 살고 다. 언쟁의 순간이 도래하면 심장이 터질 듯 벌렁거리고 노래할 때도 잘 안 되는 바이브레이션에 발동이 걸린다. 그런 상황을 최소한으로 만들기 위해 친절한 척, 착한 척 위장술을 펼다.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착한 척하면 만만하게 보는 사람도 많다. 정말 착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심하게 넘폭발한다. 강도는 매우 세다. 다시는 안 볼 작정으로 덤빈다. 근데 이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단지 계획일 뿐이다. 속으로 '아 또 당했구나'며 넘기는 일이 다반사다. 따박따박할 말 다하는 친구나 동료들을 보면 경이롭다. 부럽다.


최근 회사 업무로 에이전시를 통해 섭외한 모델들 지방 촬영을 다녀왔다. 몇 년 전 여름에도 똑같은 촬영을 한 적 있다. 계절과 모델만 바뀌었다.


촬영은 실내외 온천에서 진행됐다. 모델은 남녀, 여자 아이 총 3명이었다. 에이전시 팀장과 아이 엄마가 동행했다. 모델 촬영 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데이 페이로 계약했다.


오전 10시에 만났다. 차 한잔 하면서 영에 대해 설명하고 11시부터 시작. 12시 점심을 먹고, 1시 30분부터 다시 촬영 개시. 3시까지는 실내 촬영이었다. 휴식을 취한 후 3시 반부터 노천 온천에서 촬영을 재개했다. 날이 좀 추웠다. 4시 반까지 촬영하고 휴식 후 일몰 시간(5시 03분)에 맞춰 30분 야간 촬영 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는데 남자 모델이 따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찍어요? 추운데 제대로 쉬지도 않고,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요."


<이미지 출처 : pixabay>


나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다. 당황했다.


"아니… 빨리 찍고 일찍 끝내려고... 아까... 휴식... 하루 동안 찍기로... 계약..."


갑작스러운 기습에 버벅거렸다. 나만큼이나 당황한 에이전시 팀장이 모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수영복만 걸친 모델이 추울 것 같아 십 오초 정도 망설이다 쫓아 나갔다. 빨리 끝낼 테니까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에이~ 왜 그래요~'하면서 넉살 좋은 듯 쿨한 척 하고 싶었지만 성격상 못할 짓이었다.


아이와 여자 모델도 신경 쓰였다. 미안하다 빨리 끝내주겠다고 했다. 아이 엄마와 여자 모델은 웃으며 괜찮다고 답했다. 남자 모델만 구석에서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남자 모델을 힐끔 보더니 "제일 건강해 보이는데..."라며 따듯한 미소를 내게 선물다.  


시간을 두고 곱씹으니 하지 못한 말들이 머릿속 떠다녔다. 불만이 있으면 에이전시 팀장을 통해서 광고주한테 얘기하는 게 순서다.  못 참고 대놓고 들이 건 분명 잘못된 태도였다. 신경 쓰여 서둘러 촬영을 마쳤다.


고생했다는 인사에 남자 퉁명스러운 눈짓을 건네고 떠났다. 에이전시 팀장이 대신 사과를 건넸다. 씁쓸.


뭔가 당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할 말을 제대로 못한 화가 슬슬 올라왔다. 정당하게 회사 업무를 수행하다 모델의 감정에  들었다. '마냥 웃어주는 내가 만만해 보였나'라는 상상에까다다랐다.


멘탈 탄한 사람이었다면 당황하지 않고 조목조목 따졌을 거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지 못했다. 그저 마음속에 쑤셔 넣고 적당히 갈아내면서 순간을 살아 내고 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출처 모르는 가르침을 마음속 깊숙이 간직한 채.


나는 착하지 않은 속마음을 간직하고, 착한 척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평화주의자다.


그래서 더 이상 강한 척에 집착하거나 애써 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내 모습 그대로가 제일 쉽고 마음도 편하다는 걸 수십 년간의 마음고생을 통해 깨달다.


포토그래퍼에게 촬영 사진을 받았다. 사진을 볼 때마다 불편했던 상황이 자꾸 떠올랐다. 이 사진은 향후 몇 년간 써야 한다. 그때마다 소중한 내 감정을 소모할 수 없기에 12월 31일, 사진을 보며 화해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나는 유리멘탈 인간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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