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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Feb 11. 2020

서른 살의 시작,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를 신입사원처럼'


화창한 봄, 서른의 우울한 백수는 차가운  현실에 떠밀려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취직하기 힘들고, 공무원을 제외한 직장인 평균 근속기간이 5년이 채 안 되는 요즘, 십수 년을 한 직장에, 그것도 대기업에 다닌다. 서서히 끝이 보이지만 아직은 안정적이다. 이곳에 나는 아르바이트와 계약직을 거쳐 정직원으로 어렵게 입사했다. 입사 과정을 비롯해 지나온 세월이 녹록하지 않았다. 소외감과 차별을 느끼고 홀로 감수했다. 기회였기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꿋꿋이, 열심히 버텼다. 모든 게 소중한 경험이고 커가는 과정이었다.


누구나 살면서 온갖 시련을 겪는다. 그런데 상황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 시련을 자기만 겪는 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매 순간을 어떻게든 살아간다. 우습게도 시간이 지나면 미소 지으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추억한다. 그 시절을 곱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사연 없는 무덤 없듯, 우여곡절 없는 직장인 없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지금도 이겨내고 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다. 좌충우돌, 다사다난했던 십 수년의 회사 생활 덕분에 후배들을 위한 책도 펴낼 수 있었다. 흔한 말이 진리가 돼 뒤통수를 칠 때가 있다. 내 직장생활이 그랬다.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남다른 직장생활을 겪으며 동료들은 느끼지 못한 특별함을 얻었다. 덕분에 직장생활이라는 경험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남들보다 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으려고 애썼다. 이제는 그런 노력조차 추억이 됐을 만큼 적응했다.



서른 살의 시작, 아르바이트


스물여덟 살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인생이 허무했다. 일 년 동안 야근만 하던 광고대행사를 박차고 나왔다.


"네가 잘 나가는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경력도 없고… 대학원 졸업한다고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냥 다니지? 어머니도 모셔야 할 텐데."


학업을 위해 그만두겠다는 내게 건네는 팀장의 위로였다. 자존심 긁는 위로는 퇴사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해줬다. 미국에 있는 누나한테 빌붙어 유학을 하려고 했다. 어느 정도 준비했을 무렵, 몸이 불편한 외할머니를 모시는 엄마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국내 언론대학원에 입학했다. 기자가 되고 싶었다. 모 경제지와 어린이 신문사에 도전해 최종 면접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다.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 뒤로는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관련 경력을 쌓으려고 인터넷신문 필진과 넷포터 활동을 했다. 모 경제지에서 스폰서 섹션 기사광고를 따 오는 영업 비슷한 일도 했다. 문화예술 분야를 다루는 작은 언론사에서 수습기자도 했다. 60만 원의 열정 페이 덕(?)에 모아놓은 돈이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심지어 열정 페이로 연명하던 중 잘렸다. 학생 백수이자 취준생이 됐다. 엄마 눈치가 보여 아침마다 동병상련을 나누던 백수 친구와 약수터에 자주 올랐다. 어느 봄날 대학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아르바이트 소개 건이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아르바이트를 해요."


말은 저렇게 했지만 대기업이라는 말에 혹했다. 면접일을 잡았다. 대학원 등록금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찬밥 더운밥이 대수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 다 경험이야. 아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직은 학생 신분이니까 아르바이트로 경력 쌓는 것도 괜찮아.' 내 나이 서른의 봄이었다.


다행이었다. 면접 본 팀장이 대학 전공과 광고대행사 경력, 대학원 전공을 마음에 들어했다. 심지어는 얼마 받고 싶으냐고 물었다. '뭐지? 떠보는 건가? 그렇게 급한가? 주는 대로 받으라고 해야 맞는 거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역시 대기업이라 다르구나!’라고 결론지었다.


모 언론사 최종 면접에서 수습 기간에 월 80만 원을 준다는 말을 들었고, 단기간에 잘린 수습기자 시절에는 월 60만 원 남짓 받은 경험이 있다. 내 수준이 딱 저만큼 같았다. 작아져 있었다. 대답을 못 하니 팀장이 자상하게 다시 한번 물었다. 돈이 궁했다. 절충하자는 생각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200만 원은…."

"그렇게 합시다!"


화끈한 답변이었다. '알바 월급이 200만 원이라니! 도대체 이 회사 직원들은 얼마를 받는 거야?' 놀랐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이 하나같이 대단해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일사천리로 계약이 성사되고 출산휴가를 간 고마운 임산부를 대신해 3개월 단기 아르바이트 여정이 시작됐다. 3개월이 지난 뒤 3개월 더 연장했고,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1년 뒤 꿈에 그리던 정직원이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성취한 일은 아니다.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논문을 써 대학원도 무사히 졸업했다. 대학원 졸업이 입사 조건 중 하나였다. 학업을 병행하면서 회사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회사에 무조건 잘 보이고 싶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가슴 쓰린 일도 견뎌냈다. 한 번은 출입문에 카드 키를 찍는데 옆에서 누군가 "삑! 알바입니다"라는 비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카드 키에 적힌 사원 번호가 달랐다. 명절에 정규직은 현금 봉투를 받을 때 선물세트를 받았다. 치약과 샴푸가 잔뜩 든 커다란 상자를 들고 퇴근하는 게 창피했다.


남들보다 쉬운 방법으로 입사한 건 맞다.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감수할 일도 많았다. 공채나 경력직과 달리 제대로 된 입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아르바이트생 때부터 실무를 맡아 실전에서 모든 걸 배웠다. 누군가는 내게 뒷구멍으로 들어왔다는 고급진 표현을 사용했다. 자기 동료를 쫓아내고 자리를 꿰찼다는 말을 면전에 던지기도 했다.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취업 준비할 때 걸렸던(술도 못 마시는데) 역류성 식도염, 미란성 위염, 위궤양, 십이지장염, 헬리코박터로 인한 질병 등이 취업 후 저절로 나았다. 자연스럽게 '건강해진 몸과 마음을 바쳐 더욱 열심히 일해야지'라고 다짐했다.


돌이켜보면 입사 경로가 달랐을 뿐 실력이 남들에게 크게 뒤처지지는 않았다. 밀리지 않으려고, 못나 보이지 않으려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늘 정신을 바짝 차렸고, 궂은일도 야근도 기꺼이 나섰다. 주중에 이틀은 대학원에 나가야 했기에 연애를 뒷전으로 미루고 주말에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참다못한 여자 친구(다행히 지금의 아내입니다)가 주말마다 출근하는 걸 믿을 수 없다며 회사에 찾아오기도 했다. 참 열심히 일했다.


이렇게 추억하다 보니 서럽고 더러운 순간만 가득해 눈물로 지새운 세월 같지만 그렇지 않다. 열등감이 크지 않았다. 깊게 파인 상처도 없다. 이미 치유됐다. 처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안정된 직장생활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업무 영역이 넓어지면서 여러 팀 사람과 함께 일하며 어울렸다. 공채들과 달리 동기는 없었지만, 친한 동료들도 생겼다. 회사와 일, 직원들과 서서히 동화됐다.


나이 드니 좀 뻔뻔해지기도 한다. 간혹 출신 성분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분위기에 따라 이렇게 대답한다.


"대학원 다니다 인턴으로 6개월 일하고 입사했어요."


'인턴' 뜻이 '정식 구성원이 되기에 앞서 훈련을 밟는 사람'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아르바이트(본래의 직업이 아닌, 임시로 하는 일)나 인턴이나 정식으로 채용되지 않고 임시로 일하는 건 같다. 아직도 이렇게 말하는 선배도 있다.


"쟤 알바 출신이야."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 선 내게 열등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독특한 출신 성분 이 나를 더욱 견고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순탄하게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면 절박함도 만족감도 덜했을 거다. 그렇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좀 더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고, 매사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았다. 무엇보다 잘난 사람들 틈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통해 적응 방법을 터득했다.


아르바이트 시절, 계약직 시절을 거쳐 대기업 정직원으로 자리 잡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직장생활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다. 남들보다 조금 어설프게 시작한 직장생활이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절박하게 터득한, 독특한 과거에서 배운 노하우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만이 서민의 아픔을 알고, 삶의 깊이를 안다.


지금 상황이 희망 없는 최악이라고 느껴지더라도 비관적으로만 생각 말고, 극복 과정을 성장의 기회로 삼으면 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결정짓지 않는다.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준비하면서 미약하게라도 성장한다면 변화는 분명 찾아온다. 성장을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둔해질 줄 아는 지혜다. 그래야 버틸 수 있는 에너지를 쉽게 낭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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