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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Mar 25. 2020

14살 어린 후배의 거침없는 일격

"선배 대접받고 싶으면 선배답게 행동하셔야죠"


퇴근길 큰 기업에 다니는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카톡이나 주고받던 사이라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아니다 다를까. 친구는 하소연으로 시작해 한탄을 늘어놓더니, 자격지심을 머금은 분노 표출을 비롯해 자존감 추락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40여분이나 통화했다. 이렇게 오래 통화해 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 처음인 거 같았다. 그만큼 사연은 구구절절했고, 나 역시 친구의 목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난 세상에서 인간관계 원만한 사람이 제일 부러워. 직장생활 반올림하면  20년인데도 사람이 이렇게 힘드냐."


보통 이런 대화의 시작은 상사 때문이었다. 오늘은 후배 얘기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에게 마음을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했다. 분하고, 화도 나도,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고.


계약직으로 일하던 후배를 친구가 추천해 정직원이 된 지 2년여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같은 실수를 수시로 반복하는 후배를 보면서 볼펜을 책상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사건의 도화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입모양이 C8을 그려버렸다. 다행히 소리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후배는 똑바로 쳐다보면서 "지금 저한테 욕한 거 다 봤습니다"라고 대들었다. 친구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하는 거냐고 나무랐다. 후배는 똑바로 쳐다보면서 묵묵부답 잘못한 게 없다는 자세를 취했다. 욕한 건 미안한데, 선배한테 지금 그 태도가 뭐냐고 나무랐다.


"선배 대접받고 싶으면 선배답게 행동하셔야죠."

"내가 선배답지 못하게 행동한 게 뭔데?"

"업무시간에 인터넷 하고, 카톡 하고, 자리 자주 비우시잖아요."

"할 일 다 하면서 쉴 때 잠깐잠깐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던데요."


대화의 핵심이 완전히 빗나갔다. 친구는 당황스러워 멍하게 서있다가 나중에 얘기하자며 자리를 피했다. 후배는 구보다 14살 어렸다.


처음에는 너무 분해서 죽이네, 살리네 하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친한 상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더니 요즘 회사는 후배들이 느끼는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 좋게 좋게 넘어가라는 처방전을 내밀었다. 일을 크게 만들지 말라는 충고였다.


하루가 지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아 후배를 불렀다. 순간적인 반항심으로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쌓인 게 있거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보라고 했다. 묵은 감정을 시원하게 풀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친구는 또 한 번 강력한 충격을 먹었다.


친구가 정직원 제안을 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는 후배가 내심 고마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고 자기기만이었다. 후배는 자기가 정직원 제안을 받은 건 일을 잘해서 라고 여겼다. 오히려 선배랑 일 하는 게 힘들 거 같아서 정직원 제안 수락을 고민했다는 벼락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실수했다고 혼낸 일부터 눈치 준 일, 선배에 대한 평이 어떻다, 선배 때문에 우울증이 생겼다 등 쉴 새 없이 지난 2년 여 간의 못마땅함을 모조리 쏟아냈다.


친구는 절망했다.


"듣다 보니까 대화가 될 거 같지 않더라고. 내 꼴이 너무 우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대충 마무리하고 나왔어. 아, 쪽팔려."


처음에는 내가 더 분노했다. 그런데 친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푹 꺼져버렸다. 마무리는 단순했다.


"우리가 늙어서 그렇지 뭐. 예전에는 상사 욕만 했는데, 이젠 후배 얘기밖에 안 하잖아."


듣고 보니 그랬다. 나 역시 후배의 4가지 없는 모습에 광분한다. 그러면서도 냉랭한 태도에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눈치를 본다. 찝찝한 마음에 후배에게 괜히 다가가 말을 시키기도 하고, 괜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걱정하고, 고민하고, 스트레스받고, 안심하기도 하고.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아니. 좋게 말하면 인간관계가 수평적으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라고 표현하는 게 낫겠다. 이런 아름다운 세상에 뒤처지지 말고 하루빨리 적응하는 게 현명한 직장인의 자세겠지.


"그래. 우리가 14살 어린애랑 티격태격해서 뭐 하겠냐. 그냥 품고 가야지. 불편하게 지내서 뭐해. 내일 커피라도 사다 주면서 완전 친해져 버려."


어른의 의무를 다하자며 쓴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티 없이 가볍고 명랑하던 친구는 20여 년의 직장생활 덕에 납덩이를 20개는 삼킨 듯 묵직해져 있었다. 나 또한 하루하루 쉽지 않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만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오만 키로 무거운 생각을 달고 산다. 그래도 오늘은 친구와 함께 광분하면서 큰 위안을 얻었다.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동병상련의 동지애. 카톡이 왔다. "고맙다. 얘기 들어줘서." 초스피드로 답했다. "힘든 직장인끼리 의지하면서 술 한잔 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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