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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un 19. 2020

예측 불허 갑의 아리따운 반란

'일단 트집을 잡아 갑을 욕하는 게 을의 역할?'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시간을 도둑맞는 건 서글픈 일이다.  시간이 귀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소중하약속 시간을  지킨다. 가족, 친구, 사회에서 만난 이들과의 모든 약속 그렇다. 시간을 엄수한다는 건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사회에서는 조금 다르다. 지위에 따라 시간 개념이 제각각이다. 7시 회식에 상사가 당연한 듯 7시 반 넘어 나타나는 것처럼. 이는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과는 별개다. 조직에서는 권력 서열에 따라 시간 고무줄처럼 조절할 수 있다. 외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은 멋대로 시간을 어기거나 조정하고 '을'은 무조건 맞는 세상다.


"업체에서 도착했다고 연락 왔습니다. 미팅 다녀오겠습니다."

"하던 거 먼저 하고 천천히 내려가. 기다리겠지."


선배가 알려준 '을'을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업체와 몇 번의 미팅으로 알게 됐다. 신입사원인 나에게도 왜 그리 굽히는지. 사내에서 생글생글거리던 선배는 갑질 여왕이었다. 업체와의 시간 약속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선배는 업체와의 문제로 회사를 떠났다. 자업자득. 


선배의 특훈을 미처 다 마치기 전 나에게는 '을' 전담 업무가 주어졌다. 한 시간 넘게 팀장과 식당에서 밥숟가락 들고 '갑님'을 기다린 적 있다. 화가 치밀었지만 팀장이 잘참는 바람에 평정심을 되찾기도 했다. 10분은 기본, 20분에서 40분은 흔한 일이다. 미안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칼자루는 늘 상대 차지였. 익숙다. 알면서도 혹시 모르는 돌발사태에 대비해 약속 시간은 철저 엄수다. 다시 말하면 시간을 잘 지켜주는 고마운 분들도 있다는 말이다.      


처음 만나는 미팅 자리였다. 코로나 19에도 불구하고 냉면집은 바글거렸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두 명이요"  하지만 잘 나가는 맛집 사장은 일행이 다 와야 자리를 내준다고 했다. 역시나 10분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20여분을 홀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일행은 언제 와요? 이제 자리 없으니까 3층 가서 자리 맡아요"


사장이 배려해 줬다. 창밖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은 어느새 꽉 다. 음식 나오는 시간이 오래 걸릴 듯했다. 상대에게 톡으로 양해를 구하고 음식을 먼저 문했다.


손님과 음식을 동시다발로 기다리며 창 밖을 내다봤다.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더니 순식간에 3층에 나타났다. 낮 기온은 30도였다. 그 모습에 기분이 갑자기 흔들렸다. '역시나'라며 오해했던 마음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날씨만큼이나 훈훈한 기분이 뱃속을 가득 채웠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는 자신뛰어온 걸 내가 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늦었다 사과까지 다. 흔치 않은 일이다. 뛰어 오는 모습 하나 만으로도 충분했다. 사과까지 받으니 존중을 넘어 존경받는 기분 느낄 뻔했다.


일단 뭐든 트집을 잡아 갑을 욕하고 보는 게 을의 역할이라고 여기던 마음이 일시적으로 리셋됐다. 얼마나 까칠한 세상에 닳고 닳았으면 이런 사소함에 기뻐 날뛰게 되었을까. 쓴웃음 속 달콤한 깨달음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소중한 건 없다는 걸. 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일은 사소함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


오늘 이 사건을 '갑의 아리따운 반란'이라 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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