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짜리 작가가 되어가는 중
'소심한 직장인이자 입 근지러운 글쟁이가 살아가는 방법'
퇴사 관련 책도 글도 여기저기 넘친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왔다. 직장인이니 언젠가는 퇴사하겠지만 당장은 아니라고 믿으면서. 비굴하지만 잘릴 때까지는 버틸 생각이다. 월급이나 카드값을 보면서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긍정적인 마인드 장착이 필수다. 즐겁게 살고자 부단히 애썼다.
몇 년 전, 십수 년 직장생활 중 긍정적인 마인드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수년간의 힘든 시간과 변화를 이겨내고 행복한 직장생활에 재시동을 걸었던 시기였다. 그때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다.
긍정의 힘이었을까. 이어서 직장인 자기계발서를 몇 권 더 출간했다. 내용은 엇비슷하다. '직장에서 오래 버티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도의 모범적인 조언이다. 물론 내가 버텨온 직장에서의 삶과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그런데
역시 힘든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영원한 건 없었다. 세월이 조금 흘렀을 뿐인데 스멀스멀 검은 기운이 다시 밀려들었다.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는 걸 새삼 통감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천국과 지옥의 경계를 오락가락했다. 십 수년의 모든 직장생활을 덮어 버릴 만큼 검은 마음이 솟구칠 때도 많았다. 직장에서의 작은 파동이 거대한 스나미를 만들기도 했다.
신입사원 시절에는 불편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블로그에 옮겼다. 뇌에서 거르지 않았다. 주로 감정에 치중했다. 지금 보면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솔직 담백했다. 주제 선정에 어려움이 없었다. 그날의 경험과 팩트 그리고 솔직함이면 충분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게 바뀌었다. 모든 일에 대해 대놓고 솔직하게 글을 갈길 수 없게 됐다. 가식적인 글을 쓴다는 건 아니다. 주제나 소재 선정의 자체 검열이 점점 더 까다로워진다는 의미다. 반쪽짜리 글쟁이가 되는 기분이랄까. 이유는 보는 눈이 많아져서다. 글은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다. 반면 특정한 누군가는 내 글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직원 상갓집에서 갔을 때 일이다. 옆 테이블에서 임원과 팀장들이 모여서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가볍지 않은 분위기였다. 나중에 한 팀장이 네이버에 뜬 내 글이었다고 알려줬다. 한 회사 다니는 부하 직원이 쓴 글이니 내용과 등장인물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긍정적이었는지 부정적인 이야기였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묻지 못했다.
내 글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누군가는 한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이다. 첫 책이 나왔을 때는 격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그런데 자꾸 책이 나오자 주변에서 슬슬 불편한 눈빛을 보냈다. 누군가는 나에게 '책 쓰는 직장인 이미지를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확신에 찬 조언을 전했다. 이 정도면 경고인 거다. 취미를 버리라는 뜻이다. 보는 눈이 많아지니 어느 순간 나 자신에 대한 조심의 눈이 떠졌다. 감시당하는 기분을 늘 품고 살아간다. 쓰고 싶은 글을 묻어두기도 한다. 작가의 서랍에 넣었다가 결국 삭제하는 경우도 있다. '책 쓰느라 업무에 지장 있지 않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작가명을 본명에서 필명으로 바꾸기도 했다. 온라인 여기저기 묻어있는 내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
각양각색의 감정이 수시로 교차했다. 대놓고 눈치 주는 사람에게, 소심한 나에게 동시다발적으로 화가 나기도 했다. 나는 주위를 신경 쓰는데, 주변 사람들 일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점점 더 소심하게 작아지는 나만 남을 뿐이었다. 결국은 내 손해였다.
여전히 주변이 신경 쓰이고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동안의 나를 지우거나 감추지 말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들의 의심은 사실이 아니니까. 열심히 살아온 내 흔적인데 어쩌라고. 다만 직장생활, 직장 사람 이야기를 줄였다. "이거 내가 한 얘기 같은데, 내 얘기 아니야?"라는 한 임원의 말을 잊을 수 없다. 물론 아니었다. 직장생활보다는 일상의 조각에서 남다른 의미와 소중함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객관성을 유지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심사숙고하는 중이다.
소심한 직장인이자 입이 근지러운 글쟁이가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