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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Oct 20. 2022

전화번호를 모조리 지우는 행복한 상상

'스마트폰 속에서 잠자는 그리운 이름을 꾸욱 누굴 타이밍!'


금요일 저녁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작년 우리 엄마 장례식장에서 친구를 만고 입장이 바뀌어 다시 장례식장에서 마주했다. 절친에서 수년 만에 한 번씩 만날까 말까 한 사이가 되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 회사 워크숍을 마치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카카오톡에 생일인 사람들 리스트가 보였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고 싱거운 축하와 안부를 전했다. 그 아래에는 프로필 사진을 업데이트한 지인들 목록이 보였다. 손가락을 위로 올려 조금 더 아래쪽을 살피다가 특별한 숫자를 발견했다.


'친구 1977'


"출근하면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1,400여 명의 번호가 등록되어 있었다. 10여 년 훌쩍 넘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모아 온 소장품이다. 그런데 최근 한 달간 통화한 사람은 10여 명 남짓 될까. 아무리 많은 연락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번호는 숫자일 뿐 전화번호 개수가 진정한 인간관계를 대변하지는 못한다. 친밀한 관계는 강요로, 이해타산적인 마음으로는 결코 맺을 수 없다. 자석 같은 끌림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2019년에 출간한 책 <착각은 자유지만 혼자 즐기세요>에 담긴 문구다. 휴대폰 속 연락처는 3년 만에 1977명이 되었다. 1977년생 직장인의 폰에 담긴 '친구 1977'이라는 숫자가 끼어 맞춘 듯 묘했고, '친구'라는 단어는 부담스러웠다. 여전히 자석 같은 끌림 없는 숫자였다. 상당수는 평생 연락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직장인이기 때문에 혹시 몰라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차근차근 목록을 살펴보니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아마 전화번호가 바뀌어 생판 모르는 이들의 번호도 많이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가족을 비롯해 당장 만나고 싶은 친구들,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됐어도 아무렇지 않게 전화할 수 있는 사람들, 용건 없이 연락 가능한 친밀한 이들, 존경하는 선배, 보고 싶은 후배들을 빼고 나머지 전화번호를 다 지우면 어떨까'


문득 사회적 관계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친밀함이라는 감정이 새겨진 사람들을 마음껏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연락처 숫자를 최소화해 진심으로 마음이 동하는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부담 없이 만나는 일상을 상상해본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절친이다. 20대 때까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결혼을 하고 저마다의 삶을 살며 만남도 연락도 뜸해졌다. 나이가 들면서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어색할 만도 한데 오랜 공백이 무색할 만큼 낯설지 않은 친구들이 있다.


스무 살 갓 대학에 들어가서 아는 이 하나 없어 외로웠을 때 다가온 재수생 형군대를 다녀와 복학 후 만난 후배가 있다. 만남은 잠깐이었지만, 그때 만난 친구들 중 유일하게 연락하며 20년 넘게 마음을 이어오고 있다. 집착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남을 사람은 결국 서로의 마음에 머문다.


중학생 딸아이가 진로 상담을 했다. 상담사는 마지막에 친구들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을 내주었다고 한다. 딸아이는 의아한 듯 말했지만, 아마 애쓰지 않아도 곁에 남을 친구는 남는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곁에 머무는 친구는 몇 명 없다. 죽고 못 사는 사이 같다고 느꼈어도 스치듯 사라지는 인연도 많다. 하물며 사회에서 명확한 용건을 기반으로 한 사이는 어떨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 처음에는 직장을 그만두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다면 당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직장인을 당장 그만둘 수도 없고 폰을 가볍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다. 현대인은 모두 시간 없다는 핑계를 달고 산다. 먹고살기 위한 핑계가 아닌 제한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살아야 하는 빠듯한 일상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두어 명이라도 소중한 이들에게 용건 없이 안부를 물으면 어떨까. 뜬금없는 만남을 계획해 보는 건 어떨까.


책 <가장 사적인 마음의 탐색>에서 정신과 전문의이자 작가인 김건종은 "사람이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좀 덜 우울하고, 또 가끔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것. 그게 정상이에요. 혼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한 삶의 방식이고,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는 가장 쉬우면서도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함께하는 사람이 마음에만 그리던 그리운 사람이라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현대인에게는 전화번호로만 머물고 있는 소중한 사람을 가끔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 사람들에 시달리며 지친  하루하루를 소중한 사람으로 풀어내는 것이 바로 마음에 위로를 얻는 방법이다. 나이 들어 어린 시절 친구들과의 모임을 다시 결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인간관계는 처음에는 그저 같은 학교, 같은 반 아는 사이, 같은 회사 동료 등 지인으로 시작하지만, 친밀함의 밀도에 따라 관계의 유효기간이 결정된다. 오랜만에 오래도록 곁에 머무는 오랜 친구들을 만나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서로 간의 끈질긴 인연의 끈을 확인했다. 이렇게 소중하고 마음에 위안이 되는 관계가 또 있을까.


가끔은 스마트폰 속에서 잠자는 그리운 이름을 꾸욱 눌러 현실로 소환해야겠다. 계획 없이 떠나는 아름다운 추억 여행이자 지친 마음에 특별한 위안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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