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신속하면서도 커다란 깨달음은 부지불시의 경험을 통해 다가온다. 특히 건강은 더더욱 그렇다.
수술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아랫입술 2/3와아래턱을 비롯한잇몸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양볼이 호빵맨처럼 부어 어금니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죽만 먹었다. 마시는 수준이랄까. 몸무게가 훅훅 줄더니 잠시지만, 앞자리가 5를 찍기도 했다. 죽 덕분에 몸무게 5킬로 넘게감량. 맛난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28살, 대대적으로 치아 공사를 했다. 엄마가 적금을 깨야할 만큼 대단한 지출이었다. 큰 비용에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사랑니였다. 아랫니는 둘 다 가로로 누워 턱과 가까운 곳에 자리했고, 윗니 두 개는 대각선으로 기울어 코 가까이 터를 잡았다.
당시 의사는 사랑니 4개가 모두 위험하게 매복해 있으니 서울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으라며 병원까지 콕찝어알려줬다. 흘리듯 희망의 메시지도 하나 추가했다. 당장 지장이 없으면 일단 그냥 살아도 된다고.
엑스레이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매복 사랑니. 당연히 당장의 삶에 아무 지장 없었다.대공사 이후 치아 관리를 철저히 했다. 불행스럽게도 스케일링받을 때 외에는 치과에 갈 일이 생기지 않았다.
시간이 돌고 돌아 대재앙이 될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어느덧 20여 년이 흘렀고 처참한 결과와 마주했다. 갑자기 밀려드는 통증을 참지 못해 일요에 문을 여는 치과를 수소문해 찾아갔다. 두 군데의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반복해서 찍고 똑같은 설명을 들었다.
"왼쪽 매복 사랑니 낭종 때문에 턱뼈가 녹아 매우 얇아졌어요. 발치하다가 골절될 위험이 있어요. 큰 병원에 가세요. 지금 실수로라도 턱을 치면 부러질 수 있을 정도예요. 조심하세요."
동네 병원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었다. 다음날 연차를 내고 친구가 근무하는 대학병원 치과에 갔다.2차 병원에서 조차 상태가 심각해 3차 병원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겁을 줬다. '정말 서울대학병원에 가야 하나' 털썩. 망연자실.
다행히 정밀 검사를 받고 가장 빠른 수술 날을 받았다. 설 직후 일주일 휴가를 내고 수술 하루 전 입원해 홀로 수술 준비를 했다. 첫 전신마취 수술. 호~옥시 몰라병상에 처량하게누워 계좌와 공인인증서 비밀번호, 망한 주식계좌 암호, 더 망한 코인 정보까지 상세하게 메모장에 적었다. '아이들이 내 폰 비번 아니까 열어 보겠지...'
수술방에 들어가자마자 정신을 잃고 2시간 넘는 시간 동안이를 뽑았다. "그만 주무세요"라는 말을 듣고 비몽사몽 깨어났다. 얇아진 턱 일부에 인공 뼈도 살포시 넣었다. 뽑은 사랑니가 나올 틈이 좁아 턱 뼈도 일부 잘라 냈다. 세상모르고 자는 사이에 내 입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끔찍.
'4개다 깊숙한 곳에 숨어 있어 수술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 생애 최고 난이도의 난발치 경험이었을 정도라고' 친구에게 슬쩍 전해 들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수술 전 의사는 턱 쪽에는 신경이 많은데, 상태가 심각한 만큼 일부가 손상될 수 있다고 했다.
"밥풀이 묻어도 모를 수 있을 정도?"
내놓은 예시가 맘에 들었다. '입술이 찢어져도 모를 수 있어요'라는 말보다 아름다운 표현이었다.
결국 낭종과 신경이 오랜 시간 얽히고설킨 탓에 신경까지 일부 긁어냈다고 한다. 손상된 신경이 회복되는데 최소 6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걸릴 수 있단다. 완벽하게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고.
겉보기에 입이 삐뚤어졌거나 입술이 안 움직이는 건 아니니 다행이다. 나만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된다. 밥풀은 혀로 확인 후 먹으면 그만이고. 아직입술과 잇몸에 마취주사를 맞은 느낌이다. 이런 일상도 곧 익숙해지겠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
그동안 턱 부위를 씻거나 로션을 힘차게 바를 때의 통증도 사랑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입주위가 좀 불편하지만, 후련하고 시원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굴도 더 가름해진 기분이다. (의사는 4개다 발치해도 얼굴형에 전혀! 지장 없다고 했지만)
불편함 따위보다는 당장 맛있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괴롭다. 2주 동안 아침, 점심에 죽을 먹었다. 죽 쿠폰 선물을 많이 받은 탓도 있지만, 이와 잇몸에 부담 주지 않고 후루룩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호빵 같던 얼굴은 거의 가라앉았다.양 볼에는 아직 노란 멍이 희미하게 남았다. 입도 쫘악 벌어지지않는다. 그래도죽도 마시고, 연두부도 먹고, 밥도 먹고, 곶감도 먹고, 만두도 작게 썰어 먹는다.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는 고기도 곧 도전할 계획이다.배 터지게. 고무줄 몸무게도 돌아오고 있다. 다시 앞자리가 6이 되었다.
2023년을 맞아 쓴 글에'돈을 잃으면 절반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다'라는 말을 호기롭게 적어놨다. 결국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몸이 아프면 괴롭고 슬프고 화도 난다. 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이 많아져 우울해진다.
입원하고 수술하고 퇴원하면서 꼬박 일주일 동안외출하지 못했다. 하고 싶은 소소한 일들이마구 떠올랐다. 기타 학원에도 가고, 쇼핑도 하고, 푸시업도 하고, 극장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었다. 당일 글램핑이라도. 고기 먹고 시. 통증이 극에 달했던 1월 14일부터 금주 중이다. '술'이라는 것도 몇 모금 마셔보고 싶다. 알딸딸한 기분이 어땠더라.
'아, 건강' 마음대로 되지 않는 영역이다. 하지만 신경을쓴다면 지금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누릴 수있다.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반려견과 산책하는 소소한 일상도 건강해야 만끽할 수 있는 법. 건강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