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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드id Jul 28. 2023

30년 전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긴 중딩 아빠의 실체

학창 시절의 나를 돌아보며 아이들 마음을 이해합니다


오늘은 깃털보다 약간 무거운, 가볍고 유쾌한 이야기다.


중학생 아이들이 말도 잘 듣고, 청소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계획적이고, 공부도 잘했으면 좋겠다. 물론 부모의 욕심이자 이상적인 바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뭐든 억지로 할 수 없다는 사실도.


"부모가 챙긴다고 안 한다.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 난 포기!"


학창 시절에 공부 꽤나 하던 친구의 푸념이다. 어른의 높은 기대를 아이들이 충족시키기는 쉽지 않다. 이 사실을 알기에 아이들에게 최대한 잔소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덕분에 아이들을 향한 아빠의 잔소리는 근면함, 정직함 정도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인지라 눈에 거슬리는 모습을 보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입이 근질근질할 때가 있다.



이런 내 마음이 흔들릴 때는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중학생 때 쓴 일기장을 들춰본다.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낀다.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나름 모범생이었고 잘 자랐다고 자부했는데, 기억의 왜곡일까. 아버지께는 왜 그렇게 맞았을까? (가정 폭력은 아니었습니다. 잘못했을 때 아버지께서는 종아리에 신문지를 대고 때리셨습니다. 잘못만 알면 된다고)


아이들에게 아빠는 말썽 한번 안 피운 모범생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일기장에는 아버지께 혼났던 시절이 빼곡하게 남아 있다. 맞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 생생해 안쓰러울 지경이다.


"아빠께 꾸중을 들었다. 쳇! 괜히 아빠 기분 나쁘면 누나랑 나한테 화풀이 셔~"


맞춤법은 지못미

중학생 때 아빠한테 혼나고 쓴 일기의 내용이다. 중학교 1학년 아들이 나한테 혼나면 누나한테 가서 "아빠 괜히 나한테 화내!"라고 전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과거를 떠올려 보면 나 역시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일단 기분 나쁜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떠난 아버지께  죄송하다. 이제 와서. 그러면서 아이들을 한 움큼 더 이해한다.


"... 오늘은 맞지 않았다. 다행이다. 맞지 않게 잘해야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지만,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이다. 유독 방학기간에 많이 혼났다. 어질러 놓고 치우지 않아서, 할머니한테 밉게 굴어서, 시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였다. 얼마나 안 치우고, 말을 안 들었으면 꾸준히 꾸중을 들었을까. (을 안 치우는 중3 딸내미도 크면 나처럼 깔끔쟁이가 될 수 있을까? 갑자기 궁금하네요)


사탕을 사러 가서 혼났다는 내용도 있다. 추측하건대 아버지께서 무언가를 시키셨을 때 "네!" 대답만 하고, 머릿속에 가득했던 사탕 사는 일만 실천했을 가능성이 크다. 현세대의 내 아들도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다. 역시 부전자전. 갑자기 날 닮은 아들이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새 학기의 각오도 있다. '까불지 말자, 전화 간단히 하자, 편지 가끔씩 쓰자, 용돈 아껴 쓰자, 할머니한테 잘하자, 누나한테 대들지 말자, 일기를 꼭 쓰자...' 구구절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된 후부터 거의 매일  친구와 통화를 한다. "일찍 자야지"라고 이를 악물고 자상하게 말하지만, 이 역시 부전자전이었다니. 학창 시절 친구 사랑은 아무도 못 말린다. 예전에는 각방에 전화가 있었고, 모든 전화가 연결돼 있었다. 내 방에서 통화를 해도 안방에서 수화기를 들면 꼼짝없이 들켰다.



일기장에는 공부에 대한 비장한 다짐을 비롯해 누나와 싸운 내용, 나의 이상형, 여자 친구 이야기뿐만 아니라 아주 낭만적인 자작시도 남아 있다. 어린 이드id의 글 놀이터가 이때는 일기장이었다. 이 낡은 공책 덕분에 30년 넘는 세월을 기억하고 추억한다. 중학생 아이들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덤이다.


지난주부터 아이들 방학이 시작됐다. 방학 때마다 늘어졌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매번 거창한 계획표를 정성스레 그고, 무조건 신나게 놀았다. 단, 아빠의 유일한 숙제였 일기는 꼭 썼다.


2023년 여름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 계획표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선별한 중1, 중3 권장도서를 각 4권씩 선사했다. 방학에는 책을 읽고, 일기 쓰면 좋겠다고 했다. 계획 실행도, 독서하고 일기 쓰는 것도 자율다. 강요해 봐야 안 할 테니까. 중딩 시절의 나처럼.


일기장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이 방에 들어왔다. "봐도 돼요?" 일기장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보여줬다. 중1 아들은 킥킥 거리며 "초등학생 때 쓴 거 아니에요?"라고 했다. 중3 딸내미는 딸내미는 남자 중학생이 이러고 있는 거 상상이 안 된다면서도 "내용은 다 제 얘기 같은데요?"라고 했다. 아이들이 뭔가 안심하는 눈치다.


중학생 삼인방(딸과 아들 그리고 중학생 아빠)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일기로 남은 아빠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서 일기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착각은 자유지만 혼자 즐기세요'라는 책 제목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중학교 때 일기를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아이들을 이해한다. 일기를 남기지 않았다면, 그 시절을 떠올리며 수시로 곱씹지 않았다면 아이들을 지금만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어린 시절 내 일기를 분석하며 나 역시 내 아이들과 비슷한 시절을 보냈다는 게 신기해 웃음이 삐져나온다.


초중고, 대학생, 군대 가서 쓴 일기장이 10권 넘게 곁에 남아있다. 아버지의 권유이자 강요로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5학년 때까지 쓴 일기장은 안타깝게 사라졌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일기의 역할, 과거 내 글(일기)을 분석하는 재미, 기록의 놀라운 순기능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이 먼 훗날 자신의 일기를 들춰보며 오늘의 나처럼 미소 지으면 좋겠다. 작은 아빠의 작은 바람이다.



<차곡차곡 쌓인 낡은 일기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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