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송합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 가보는 수밖에
‘열심히 – 그러나 수동적인’, 미국 이전 내 삶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대학을 가야 하니 대학에 갔고, 졸업을 해야 하니 학점을 채웠으며, 취업을 해야 하니 여러 대외활동을 했다.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시점에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국제관계학과 홍보광고학을 전공했다. 어디든 접목할 수 있지만 그래서 어려웠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에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내 주변에는 똑똑한 친구들이 많았다. 똑부러진 내 친구들은 하나, 둘 이름 있는 대기업 혹은 공단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했고 그 사실에 나는 위축되었다. 사회적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유일한 강점은 영어였다. 하지만 전문성 없이 영어를 할 줄 아는 것은 마치 배를 가졌는데 지도가 없어서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과 같았다. 내가 지도를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배를 믿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직접 다 가보는 것이었다.
영어를 좋아해서 통역봉사단 등의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미국 본토에서 원어민들과 직접 소통하고 싶은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환학생 프로그램과 해외 유학원 등을 알아보았다. 그러던 중, 정부지원 해외인턴십 WEST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WEST 프로그램은 내가 동경해오던 미국에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재정지원금이 제공되며 취업 준비 중인 나에게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항해를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목적지가 생겼다.
무언가를 이렇게 간절히 원해본 적이 있는가
수동적 受動的 (명사)
1.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것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사전에 따르면 ‘수동적’이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의 작용을 받아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나는 삶에서 무엇을 간절히 원해본 적이 없다. 이때까지 내가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는 수험생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이 대학 진학이 인생의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사회에서 필요하다니까 일단 대학에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했을 뿐이지, 진정으로 원해서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수시로 대학에 갔는데 대개 수시를 쓰려면 진로가 확실해야 한다.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때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진심으로 원하는 목표가 아니다 보니 무슨 과를 써도 상관이 없었고 어떤 대학에 붙어도 상관이 없었다. 딱 필요한 만큼의 노력을 들였을 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3 때 작성한 자기소개서는 아직도 부끄럽다. 고3의 다듬어지지 않은 언어가 부끄러운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좋은 글이 아님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WEST 프로그램을 발견했을 때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가고 싶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고, 해당 기수에서 미끄러지면 취업 적정기 (지금은 이 개념을 믿지 않지만)를 고려했을 때 다시 해외 인턴에 도전할 여유가 없었다. 고3 시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18년의 노력을 대변하는 수험시절의 작성했던 자기소개서보다 한 번 스윽 찾아본 WEST 프로그램 자기소개서에 영혼을 갈아넣을 만큼 미국에 가는 것을 간절히 원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열망하는 무언가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