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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Jan 24. 2022

타인의 집안일

집안에서 만보 걷기

  공부를 조금 잘하는 딸을 둔 우리 시대 어머니들이 그랬듯 우리 엄마도 날 키우는 동안 굳이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거기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결혼하면 다 하게 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은 무슨 결혼이냐 혼자 살면서 집안일도 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아휴, 대체 어쩌란 말이야 투덜거리면서 혼자 애쓰는 엄마가 안쓰러워서 도운 적도 있었고, 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핑계 삼아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리기도 했다. 결혼하기 전 나의 가사 능력이 매우 낮은 상태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

 

  결혼을 했더니 (심정적으로) 거대한 집이 갑자기 내가 관리할 대상이 되었다. 이상한 게 너무 많았다. 이를 테면 욕실을 왜 더러워지는가. 거기서 맨날 비누로 닦고 물로 씻는데. 샤워하고 나오면 둘이 섞여서 마법처럼 깨끗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창문을 닫고 있는데 먼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생선을 구우면 왜 이렇게 비린내가 나나? 다른 사람들 집에는 비밀의 생선구이 도구가 있는 건가?

  가스레인지는 왜 알아서 깨끗해지지 않을까. 설마 매일 닦는 건 아니겠지. 설마...?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한테든 허심탄회하게 물어보면 됐을 것 같다. 우리 집은 어째서 더럽고, 나는 왜 요리를 못 하지? 하지만 그때는 그러지 못했다. 친구 중 결혼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고,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난 이제 너희와 다른 세상에 있다고 선언하는 일 같이 느껴졌다. 그랬던 것 같다. 엄마한테 물어보면 실용적인 답은 주지 않으면서 나중에 혼자 마음만 아파하니까 묻기 싫었다. 집안일은 나에게 매우 중차대한 일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이제와 굳이 쓰는 건지도 모르겠다)


  친구 없고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 의존할 것은 책뿐이다. 주부가 되고 십 수 년간 레시피북은 물론이고, 청소의 기초, 빨래 첫걸음, 주부 잡지, 가사에 관련된 에세이를 열심히 찾아 읽었다. 결혼하고 가장 많이 읽은 분야는 단연코 ‘가정’일 것이다. 지식만큼은 남부끄럽지 않게 쌓였다. 아는 것을 얼마나 행하는가, 그것이 문제인데 지식을 100% 실천하는 것은 집안일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일주일 만에 욕실 배수구를 열고 쌓인 머리카락에 경악하며 다른 집은 이러고 안 살 거야, 하고 생각한다.

  쭈그리고 앉아서 낡은 양말로 창틀에 쌓인 먼지를 밀어내며 다른 집도 이러고 사나? 하고 생각한다.

  치간 칫솔로 보온병 뚜껑 틈새를 닦으며 아니, 다른 집도 이러고 사냐고! 생각한다.

 

  면학정진하여 집안일 생초보를 벗어났더니 집안에 있는 것들이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많은 일을 다들 어떻게 처리하며 살고 있나 알고 싶었다. 타인의 집안일이 너무도 궁금해졌다. 궁금해지자 곧 깨달았다. 타인의 집안일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부터 집안에 사람이 없을 때, 적어도 재택인원수가 줄었을 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모두 쉬고 있는데 혼자 팔 걷어붙이고 쓸고 닦자니 보는 사람 마음이 불편할 것 같고, 고립 집안일을 해온 버릇인지 내 입장에서도 주위에 누가 있으면 괜히 조급증이 도진다. 가족 앞에서도 이런데 가족 외의 타인에게 집안일하는 모습을 노출하게 되는 일은 좀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벌어지게 두지 않는다. 다른 주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결국 내가 누군가의 집을 방문해서 볼 수 있는 건 집안일이 아니라 집안일의 흔적이다. 깨끗한 현관에서, 잘 정리된 선반에서, 혹은 수전에 남은 물방울 자국에서 타인의 집안일을 발견한다. 그조차 뚫어지게 보면 실례니까 눈 깜빡할 만큼만 보고 얼른 시선을 돌려야 한다.


  고무장갑을 낄 때 소매를 걷는지, 아니면 장갑 속에 집어넣는지. 행주를 삶아 쓰는지, 아니면 과탄산수소를 탄 물에 담궈 놓는지. 음식을 할 때는 생수를 쓰는지, 수돗물을 쓰는지. 쓰레기 비닐은 한 장씩 접어놓는지, 아니면 점선대로 입구를 뜯어 빼서 쓰는지. 붙잡고 묻지 않는 이상 이런 것들을 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몇 안 되는 주부 친구들에게도 어쩐지 그런 걸 캐묻지 않게 된다. 이것도 고립 집안일을 해온 습관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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