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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차 Jan 17. 2022

우리 집에는 가끔 산이 생긴다

집안에서 만보 걷기

  우리 집에는 가끔 산이 생긴다.

  그 산의 구성 성분은 빨래.

  옷을 빠는 건 세탁기라고들 하지만 사실 빨래는 많은 단계로 이루어진 작업이다. 빨랫감이 세탁기 안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빨래는 언제 시작되는가. 엄격하게 따지면 개켜 놓은 옷을 꺼내 입은 순간이라고 봐야 할지 모른다. 서랍에서 나온 옷은 필연적으로 빨래통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다만 일로서의 빨래는 각 공간에 흩어져 있는 빨랫감을 모으는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등교한 아이들이 벗어던진 잠옷을 줍고, 체취가 밴 침구를 벗겨내고, 얼룩진 매트를 거두어들이는 일부터 빨래라는 작업이 시작된다.


  처음 집안일을 배울 때는 색깔 옷과 흰옷을 구분해서 빨아야 한다고 들었다. 살아보니 우리 집은 급한 빨래와 덜 급한 빨래로 구분해서 빨게 된다. 젖은 수건, 운동복, 매일 학교에 가져가야 하는 천류 같은 것은 급한 빨래다. 비가 오든 바람이 오든 그날 빨아서 말려야 한다. 그 다음이 바깥옷. 침구 같은 것은 일상적인 빨래 루틴에 들어가지 않고, 그 주의 일기예보를 보면서 길일을 정해 빤다.


  빨래할 순서를 정하면서 애벌빨래할 것, 따로 빨 것 등을 구분해서 모으면 드디어 세탁기가 나설 차례다. 빨랫감이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시간은 4~50분 정도. 많은 주부들이 그 사이 청소기를 돌리거나 싱크대를 정리하는데, 드디어 쉬려고 의자를 꺼내면 바로 그 순간 빨래 종료음이 들려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세탁기 앞에 불려 가기 마련이다. 빨래 종료음의 법칙이다.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낼 때는 행거나 빨랫대에 걸 것과 집게걸이에 말릴 것으로 미리 구분하면 좋다. 양말도 짝을 맞추어 정리한다. 이렇게 모아둔 빨랫감을 베란다로 들고나가서 넌다. 햇빛을 맞아야 하니까 빨래 관련 작업은 오전 중에 마쳐야 한다. 해가 지기 전에 걷는 것이 좋지만 안 마른 날은 아침햇살이라도 맞으라는 마음으로 다음 날까지 널어둔다.


  빨래란 이토록 주부의 하루를 관통하는 일이다.

 

  그런데 치밀한 계획 아래 빨랫감 찾기부터 걷기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빨래가 어찌 된 일인가 걷고 나서 ‘어딘가’에 내려놓는 순간 중단되고 만다. 아니, 어찌 된 일인가는 아니다. 내가 그만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휴, 빨아놓았으니 (거의 다) 됐어.


  이 단계에서 기력을 소진하는 사람은 나뿐이 아닌 듯 살림법을 소개하는 책을 읽으면 마른 빨래를 빨리 처리할 수 있는 비법이 자주 소개된다. 예를 들어 쌓을 것이면 보이는 곳에 쌓으라. 눈에 보이면 결국 개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 말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안 갤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집에는 빨래를 쌓아둘 절호의 공간이 있다. 바로 안방에 딸린 워크인 클로젯이다.

  워크인 클로젯은 말 그대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옷장이다. 안에는 어른 두 사람이 서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널찍한 공간이 있다. 위치도 절묘하다. 세탁실과 부엌을 지나 베란다로 나가는 길과, 안방을 통해 어린이들 방으로 이어지는 길의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베란다에서 걷은 빨래를 이곳에서 개면 각 방 옷장으로 보내기도 편하다. 마른 빨래를 이곳으로 운반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 같았다.


  이 집으로 오기 전에는 세탁실과 베란다 사이에 거실이 있어서 걷은 빨래는 일단 소파 위에 모였다. 낮에는 짬이 안 나니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갰는데, 거실 한가운데 빨래가 쌓여 있으니 하루 종일 날 좀 치우라고 재촉받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했다. 이사 와서 워크인 클로젯을 보고는 쾌재를 불렀다. 낮에는 여기 두었다가 밤에 개면 되겠군. 오케이. 양손 가득 안고 들어온 빨래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옷장 문을 닫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쌓여 있는 옷을 보고 한숨을 쉰다. 그래도 오늘은 오늘의 빨래가 있으니까 세탁기를 돌리고 어제의 빨래를 걷어 와서 그 위에 쌓는다. 문을 닫는다. 이것이 반복되면 며칠 후 아주 넓은 구릉지대를 가진 해발 50cm 정도의 빨래산이 옷장 안에 우뚝 서게 되는 것이다.


   정도 규모의 빨래산은 무너뜨리는 것도 큰일이다. 산을 해체하고 시원하게 드러난 옷장 바닥을 보면 이제 빨래산을 쌓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알록달록한 산이 다시 옷장을 점거한다. 사실 나는  하나 정도 집에 솟아 있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보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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