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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kingmom B Jan 12. 2022

직장인의 술

B의 현실 직장 생활

 나의 주량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혓바닥, 담그면 취한다.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한 잔 드시고 병원에 가시는 아빠와 술을 마셔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시는 엄마 사이에서 중간 정도로 태어났으면 좋으련만, 나는 아빠를 닮았다. 딱 맥주 한 잔이 나의 주량이다.


 믿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고등학교 때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고 대학생이 되어서야 마셔봤다. 그래서 내 주량도 몰랐다. 첫 술자리에서 소주 2잔을 먹고 벌벌 떨며 얼굴이 터질 듯한 나를 보고선 학부에서 꽤 잘 나가는 오빠가 나에게는 술을 마시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 오빠의 호위 덕에 술을 못 마시면서도 학부 생활을 꽤 즐길 수 있었다. 단골 술집도 몇군데 있었다. 가면 사장님과 노닥노닥 수다를 떠는 일도 참 재밌었다. 이 맛에 술을 마시는구나 싶었다. 또 어떤 술집 사장님은 내가 술을 워낙에 못 마시니 본인이 마시던 와인 딱 한 잔만 마시고 가라며 따라주기도 하셨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자리는 항상 따뜻했다.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술을 그렇게 배웠다.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시체처리반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니 절대 취하는 법이 없어서 애들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술 취한 친구들을 같은 방향 친구들에게 맡기거나 택시를 태워보내거나 하는 일이 나의 주된 역할이었다. 대학 때는 참 돈이 없었는데 눈치 빠른 친구들은 늘 날 술값에서 배제시켜줬다. 그래서 사실 그 자리에 갈 수가 있었다. 친구들이 그냥 큰소리로 떠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좋았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의 맑음을 흡수하고 싶었다. 그 때는 진짜 노는 것이 좋았다. 학교 수업 마치고 알바가 끝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밤 10시에 집에 있다고 하면 웬일로 집에 있냐고 하시던 우리 엄마는 대학 때 친구들을 만난다고 하면 절대로 걱정하지 않으셨다.




 회사를 오니 주량은 덕목이요, 필수였다. 첫 입사한 회사에서 첫 정규직 여자 대졸신입이라는 나의 위치도 애매했지만, 술로는 어디도 낄 수가 없었다. 술 좋아하는 회사 아저씨들에게 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못했고, 젊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늘 겉돌았다. 그때는 술을 못 마신다는 핀잔이나 구박보다 술을 못 마시면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진지하게 말하는 편이 더 상처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진심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가슴이 답답했다. 아주 깊은 고립이었다.

 그럼에도 일은 해야했다. 간혹 있는 접대 자리에서는 쉽게 술을 거절하지 못했다. 적당히 거절을 하다가 결국에는 소주 한두잔 마시고 토하는 경우도 있었다. 토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간절했다. 접대자리에서 거래처의 비위를 맞추는 일보다 술을 마시는 일이 늘 곤혹스러웠다.


 회사를 오고 일이 아니라 술이 숙제가 될 줄은 몰랐다. 엄청 자주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늘 술자리가 예정된 날이면 회사 생활을 하는 직장인으로 함량 미달이라 느낀 적도 있었다. '회식은 일의 연장선상'이라는 촌스러운 캐치프레이즈를 거부할 순 없었다. 라떼는 말이지를 시작하면 늘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상사들과 함께 하는 회식은 나를 말그대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상태로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0년이 넘어가니 세상이 조금 바뀌었다. 술을 권하는 것이 촌스러운 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듯 하다. 그렇다고 해도 용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술을 못 마시는 것, 또는 술을 안 마시는 것이 나에게 영향을 줄 때.

 우리 팀원 중 한 명은 종교적 이념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말 주변도 없어서 술자리에서도 항상 얼음이다. 거기에 남자라는 이유로 욕을 더 먹는다. 술을 못 마시는 나보다 욕을 곱절은 더 먹는다. 항상 술자리는 본인의 자리가 아닌 양 참석하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태도와 다른 팀원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게 서툰 그 친구의 처세에도 문제가 있지만, 아직도 회사는, 회사에 많은 사람들이 술을 권하거나 강요한다. 담배가 그렇듯 술도 기호 식품이어야 하는데 회사는 그렇지 못하다.


 당신도 혹시 술을 못 마시는가? 괜찮다. 이렇게 못 마셔도 같은 자리에서 영업 비스무리 한 일을 12년째 해오는 B가 있음이 당신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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