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힘든 취업 활동 끝에 갓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김 사원, 그가 어느 날 회사 주차장에 최근 출시된 신형 SUV를 타고 나타났다. 회사 월급 빤한데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인기 SUV를 구입하다니 의아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김 사원이 소위 ‘금수저’가 아니겠냐는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온 김 사원인데, 갑자기 금수저 소문이 들려오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조금은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신차 구입의 흥분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기다리던 연말 보너스가 들어오니 다른 물건에도 눈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오너 드라이버'로서 고급 시계 정도는 하나 있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백화점에 가서 화려한 자태의 시계 한 점을 마주한다. 시계에 자그맣게 새겨진 브랜드명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24개월 할부 결제가 가능하니 매달 부담할 금액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생각에 질러버린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공교롭게도 마네킹에 걸려 있는 깔쌈한 신상 정장 한 벌이 시선을 끈다. 유러피안 감성, 원단이 국산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들었던 그 브랜드이다. 한 번 입어만 보려고 했는데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보니 이제야 학생티를 벗고 어엿한 직장인으로 거듭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들도 이런 내 모습을 보면 같은 생각을 할 것이 분명하다. 김 사원은 또다시 신용카드를 꺼내 든다.
* 출처 : 클립아트코리아 (http://www.clipartkorea.co.kr/)
어쩐지 요즘 김 사원의 소비 패턴은 인터넷 신조어 “플렉스 해버렸지 뭐야!”를 닮아있다. 하지만 직장인들이라면 사회생활 초반에 김 사원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주위에 한 두 명쯤은 이런 이들을 보았을 테니 말이다. 사실 한 달에 겨우 30~40만 원 정도의 용돈으로 간간히 생활하던 대학생 시절을 지나 취업을 하게 되면서 수 백 단위의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기분이 묘해진다. 순간 부자가 되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게 아니겠는가. 동료들에게,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매달 돈을 벌어들이는 직장인으로서의 존재감을 뽐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학생 땐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구경하며 입맛만 다셨던 고가의 가방, 신발, 시계,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월급이 들어올 때마다 ‘지름신’이 강림하여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 많다. 굳이 본인에게 그렇게 급하거나 필요한 물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김 사원은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일까?
자동차는 승차감이 아니라 '하차감'이죠!
미국의 경제학자인 베블렌은 이와 같은 소비 행동의 특징 하나를 발견했다. 인간은 본인의 소득이나 재산의 정도를 넘어서는 고액의 상품을 현시욕을 채우기 위해 구입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소비라는 점에서 '과시적 소비'라고도 불려진다. 김 사원은 비록 아직 사회적 지위도 낮고 모아둔 돈도 얼마 안 되지만 신형 SUV, 고급 시계 그리고 이태리 정장으로부터 신분 상승의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감정 때문일까? 자동차는 승차감보다는 역시 ‘하차감’이라는 농담이 있다. 차 문을 열고 내릴 때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긴다는 말이다.
▶ 남들이 많이 사는 인기 상품이니까 오히려 안 산다고요? : '스노브 효과'
사실 많은 명품업체들은 이러한 비이성적 소비 심리를 기반으로 다양한 마케팅을 펼친다. 앞서 다룬 베블런 효과와 더불어 '스노브 효과(Snob effect)'도 대표적인 예이다. 스노브 효과는 다수의 소비자가 특정 상품을 구매하면 오히려 그 제품의 수요가 줄어드는 현상을 말하는데, 반대로 소수의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라면 구매 욕구가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참고로 스노브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백로란 뜻의 단어이다. 까마귀 떼와는 멀리 떨어져 독야청청 홀로 물가를 거니는 백로의 모습 때문인지 속물이라는 뜻도 있다.)
명품 회사들은 최고급 차량, 시계, 핸드백 등의 상품을 '리미티드 에디션(한정 판매)'으로 지정해 시중에 유통될 수 있는 물량을 제한하고, “세계에서 10개밖에 없는 물건”과 같은 프로모션으로 천문학적인 가격을 매기기도 한다. 이는 '누구나 살 수 있다면 사지 않겠다'는 희소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소비 심리가 물건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사실 꼭 고가의 명품에서만 이런 소비 심리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바로 스타벅스다. 스타벅스는 시즌별로 한정판 굿즈를 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소비자들의 구매욕과 보유 심리를 자극한다. 본래의 업종과 전혀 무관한 캐리어, 의자 등의 스타벅스 한정판 굿즈가 매번 대박을 치는 것 역시 스노브 효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스타벅스 굿즈인 '서머 래리백'과 '서머 체어'
▶ '플렉스' 해버린 김 사원,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와 같은 베블런, 스노브 효과에 의한 소비 패턴의 결과는 우리 직장인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김 사원은 언젠가부터 월말에 날아드는 카드 자동 명세서에 숫자가 만만치 않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내 모아 두었던 통장 잔고를 갉아먹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카드 결제대금이 통장 잔액을 초과해 잔여 금액은 다음 달로 리볼빙이 되기 시작한다. 결국 급급하게 만든 마이너스 통장으로 모자란 금액을 땜방 하기 시작한다. 1년에 한 번 차량 보험료 청구서라도 날아드는 달이면 심장이 덜컹하는 기분이다.
마침내 김 사원은 '긴축 정책'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회사 동료들과의 점심 모임도 빠지기 시작한다. 매 끼니마다 만 원 돈을 내는 것조차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근처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한 두 개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한다. 명색이 고급차의 오너인데 끼니를 아껴야 한다니, 벼락 거지라도 된 듯 슬프기만 하다.
* 출처 : MBC <형님이 돌아왔다> 캡처 사진
힘든 취업 과정을 거치며 직장인으로서의 품위를 갖추고 싶어 소비를 늘리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과시를 위한 구매나 속물적인 소비 행위가 지속된다면 장기적인 미래를 위한 저축이나 투자가 어렵게 된다. 이러한 소비 패턴이 지속되면 김 사원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매달 벌어들이는 돈보다 오히려 지출이 더 커져 마이너스의 늪에 빠져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필자 역시 입사 초기에는 월급 통장에 ‘돈이 쌓이는 꼴(?)'을 못 본 것 같다. 버는 족족 소비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때의 소비를 돌이켜보면 정말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좋은 물건을 구매하곤 했다고 생각한다. 서른이 넘은 지금이야 철이 조금 든 것인 지 물건으로 나 자신을 과시하는 것에 대해 흥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비싼 물건을 사면 반드시 로고나 브랜드명이 도드라져있는 형태를 원했다면('여기에 돈 많이 썼다는 걸 제발 알아줘!'라는 심리?), 이제는 기능 위주의 양질의 제품, 그리고 브랜드명은 가급적 보이지 않는 것을 선호하게 된다. 간혹 가격대가 나가는 물건을 구입할 때는 의도치 않게 과시가 될까 하는 경계심마저 들 때도 있다.
어쩌면 이러한 소비 패턴을 바꾸게 된 것은 투자의 중요성을 깨 닫게 되면서부터 일수도 있다. 물건이라는 자산을 취득하면 즉각적으로 감가상각이 시작되고, 대부분의 물건은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잔존가치가 0으로 수렴하기 마련이다. 한 마디로 물건은 사실 자산이라기보다는 비용화 되는 것이다. 반면에 좋은 기업의 주식을 사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면 그것은 비용이 아닌 '우량 자산'이 될 수 있다. 우량 자산을 사면 시간이 지나며 감가상각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점점 불어나면서 부가 증가한다. 이러한 투자라는 '마법 같은 메커니즘'에 매료되면서부터 과시적 소비와는 자연스레 멀어진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 직장인들은 언젠가 부자가 되기를 꿈꿀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베블렌, 스놉 효과를 경계하면서 아낀 돈을 시드머니로 활용하여 투자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 투자로 인한 자산의 증식이야 말로 궁극의 '플렉스'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진정한 플렉스를 꿈꾸는 직장인들을 위한 <알쓸 경제학>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