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플전자 10년 차 김 과장은 5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피우고 말았다. UDT 지옥주 훈련을 이겨내는 것만큼 힘들었던 초기 금단 현상, 그리고 그 뒤의 수많은 이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유지해온 금연 생활이었는데 말이다. 다음 달 결혼을 앞둔 예비신부 하 대리는 어떨까? 9시 이후 금식이라는 철칙을 깨고 말았다.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돌아와 치맥을 마구 먹어버리고 만 것이다! 옆 부서 장 차장도 다르지 않다. 돌연히 지름신이 강림해 그저 눈팅만으로도 즐거웠던 고급시계와 벨트를 단숨에 질러버리고 말았다. 대중 교통비를 아끼려고 20~30분 거리 회사를 몇 년째 걸어 다니던 그였는데 말이다.
자, 남 이야기처럼만 들리지는 않을 것 같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선택의 경험이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따금 무절제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그것도 갑자기 저지르게 되는 것일까?
영화 <악마를 보았다> 中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직장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건 사실이기도 하다. 그날 김 과장은 진상 직장 상사에게 된통 깨졌고, 하 대리는 연이은 야근으로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도달했다. 옆 부서 차 차장은 어떨까?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무산되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스트레스는 우리 직장인을 충동적으로 만들곤 한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왜 그런 비합리적인 행동을 유발하게 되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부터 그 진짜 이유를 함께 찾아가 보자.
심리학자임에도 개인의 심리, 유인 구조에 따른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 분야의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이가 있다. 바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생각에 관한 생각>의 저자 대니얼 커너먼 교수다. 커너먼의 흥미로운 주장 중 하나는 육체와 마찬가지로 '정신에도 체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체력에 한계가 있듯 인간의 정신에도 보이지 않는 한계선이 있다는 의미다. 커너먼은 한계를 넘어설 만큼 정신적 자원이닳아 없어지게 되면(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간은 그동안 절제 해왔던 것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한다.
그의 핵심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자아 고갈(Ego depletion)'이다. 자아 고갈이란 통제력을 유지할 정신적 자원이 점점 감소하여, 더 이상은 주체를 못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실제로 여러 실험에서 이 같은 자아 고갈은 폭식, 무절제한 소비 등 충동적이고 비합리적인 행위를 유발하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미국 국립과학원회보에는 판사의 식사 여부와 가석방 판결이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는 흥미로운 논문이 실리기도 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2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판사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가석방 심의위원회의 1,112건의 가석방 판결 사례를 분석한 결과, 첫 번째로 올라온 안건의 가석방은 65% 확률로 승인된 반면 아침에서 정오로 넘어가면서 가석방 승인율은 점점 하락하여 점심시간 직전에는 끝내 0%에 가깝게 떨어졌다. 점심 식사와 휴식시간 이후 심의가 재개되었을 때에는 떨어진 가석방 허가율이 재차 상승했다! 공정성을 중시하는 베테랑 판사들조차 배고픔과 피로를 참아야 하는 스트레스와 자아 고갈로 인해 충동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법을 다루는 판사들조차도 이처럼 가벼운 생식 욕구에 따라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니, 우리 같은 평범한 직딩들에게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는가?
누구나 알다시피 직장 생활에서 스트레스를 아예 피할 수는 없다. 전날 회식으로 과음을 하더라도 매일 아침 지옥철(?)과 같은 교통 체증을 겪고, 회사에서는 도무지 해결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직장 내 위계질서나 인간관계로부터의 압박 또한 견뎌야 하고 말이다. 이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직장인들의 정신적인 여유가 점점 고갈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아 고갈'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스트레스가 자아 고갈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거나, 애초에 자기 통제를 조금 느슨히 할 필요가 있다. 무작정 스트레스 상황을 참기만 한다면 정신적 피로도가 누적되어 결국 더 큰 불합리한 선택을 하는 경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끔은 지옥철을 피해 택시로 편안히 출퇴근하기도 하고, 정신과 육체의 피로가 쌓였을 땐 눈 딱 감고 연차도 사용해 보자. 가기 싫은 회식이라면 가끔은 핑계를 대고 그냥 빠져도 좋다. '단체 회식 같은 자리를 자꾸만 빠지면 회사에서 성공하기 어렵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말만 따르다가는 오히려 더 나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지나친 스트레스 상황에 반복 노출된 자아가 끝내 고갈되어, 치명적인 업무 실수를 하거나 평소에 잘 참아 왔던 직장 상사의 언행에 발끈하는 유혈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더 좋은 능률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게 된다.
아울러 평소에 운동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도 스트레스 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 필자의 경우는 주기적으로 새벽 수영을 하는데 숨을 헐떡일 때까지 운동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면 몸에 에너지가 차 오르는 것을 느낀다. 단, 운동은 꾸준히 하되 체중이나 식단에 너무 집착은 하지 말자. '음식 절제'에 너무 매몰되면 자아가 고갈되어 결국 고삐 풀린 폭식을 초래(도로아미타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니 오늘은 한 주간 출퇴근으로 지친 당신 스스로를 위해 치킨 한 마리를 시켜보는 것은 어떨까?오늘 밤 치킨 한 조각이 자아 고갈을 막는 '백신'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