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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과삶 Mar 06. 2019

소설 바람이 분다

음악을 듣고 주관적 느낌 쓰기: 이소라 「바람이 분다」 가사 파헤치기

“이번에 입사하는 과장님은 해외파라며?"

"그래? 뭐 들은 거 있어?"

"나도 잘은 모르는데, 미국에서 공부하고 M컨설팅에서 일하다 왔데. 엄청 똑똑한가 봐."

어떤 분이 올지 궁금하다. 해외파에 컨설팅 회사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간다. 잘생기거나 돈 많은 남자보다 똑똑한 남자에게 끌린다. 회사에 마음 가는 사람이 있다면 출근할 맛이 나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이번에 기획팀에 입사한 최성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얀 피부에 마른 체형, 180cm에 가까운 키. 잘생기기까지. 꿈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이상형을 마주치다니.


"앞으로 두 분께 잘 부탁드릴게요. 프로젝트 성공도 중요하지만, 제 경험을 공유해서 여러분이 성장하도록 돕겠습니다. 궁금한 사항은 언제든 문의하세요."

그는 디지털 마케팅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나와 입사 동기 종석은 팀원으로 참여한다. 컨설팅 회사 출신답게 최신 트렌드를 정확하게 꿰고 있다. 그의 스마트한 의사결정과 노련한 감각에 끌린다. 기획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깔끔하게 작성하고, 프레젠테이션 장표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세련미가 넘친다.


"지영씨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네요. 머리를 기르면 더 예쁠 것 같아요. 전 긴 생머리가 좋더라고요."

뜬금없는 그의 칭찬에 놀라면서도 기분은 좋다.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자, 먼저 들어가세요."

그는 외국에서 생활해서인지 매너가 좋다. 사무실 문을 잡아주어 여직원이 항상 편하게 들어오게 하고, 엘리베이터도 마지막에 탄다. 회식할 때 직접 고기를 구워 개인 접시에 올려준다. 회식이 끝나고 집에 갈 때도 택시를 잡아 문까지 열어준다. 기사님께 택시비를 주며 잘 부탁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지영씨처럼 싹싹한 여자와 결혼하면 좋은데. 누군지 몰라도 복받은 남자일 겁니다."

당신이 복받은 남자가 되면 되잖아요. 늘 칭찬인 듯, 관심 있는 듯, 말만 툭 던지고 진전은 없다.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는 모든 여직원에게 친절하니까.


"아 참 지영씨. 이번 주 대학원 면접 본다고 했죠? 제가 찹쌀떡 사줘야겠네요. 같이 갈까요?"

스쳐가듯이 한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다니. 그가 사준 찹쌀떡 덕분에 입학하기 어렵다는 S 대학원을 한 번에 합격했다. 해외파는 아니더라도 그에게 걸맞은 학력을 가지고 싶다.


"와 오늘은 지영씨와 데이트하네요. 맛있는 걸 먹어야지."

일에 집중하다 점심시간이 지난 것도 몰랐다. 고개를 드니 그만 남아있다. 같이 점심 먹으러 나가며 '데이트'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 정말 이 남자.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


"지영씨, 남자 친구 있어요?"

"아 아니요.."

"그럼 우리 서로 소개팅 시켜주기 할까요? 저도 여자 친구가 없어서 많이 외롭거든요. 지영씨 같이 참한 여자 어디 없나요?"

정말 소개팅을 원하는 걸까?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걸까?


"대박! 최과장님 이야기 들었어?"

"뭔데?"

"9월 말까지만 나온대. P사에 억대 연봉 받고 간다잖아. 집도 가난한데 어머니도 아프시다나. 역시 능력자야. 해외파라 그런가? 여기 올 때도 연봉 많이 올랐다던데. 입사한지 6개월 만에 나가다니."

나에게 소개팅 시켜달라고 할 땐 언제고 말도 없이 회사를 떠날 준비를 했다니. 그렇구나! 난 그냥 편한 팀원이었구나!


"과장님"

"지영씨, 고백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네?"

끝까지 나를 놀린다. 아니 나를 가지고 논다. 그럼에도 그가 좋다. 그의 유머가 그리워질 거다.


"고객님, 머리 어떻게 해 드릴까요?"

"쇼트커트로 해주세요."

"이렇게 기르려면 힘드셨을 텐데 좀 아깝네요. 호호. 예쁘게 커트해 드릴게요."

나의 짝사랑은 또 이렇게 끝나는 건가? 머리라도 잘라야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밖에 비 오는데 우산 가져오셨어요? 저희가 여분의 우산이 없어서요."

"아 네 괜찮아요. 가을비인가 보네요. 감사합니다."

비라도 오니 다행이다. 나는 이제 그를 잊을 것이다. 그가 준 농담, 관심, 배려, 경험, 지식 모두 다 버릴 거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얼굴을 적신다.


"괜찮으시면 우산 씌워 드려도 될까요?"

바람이 멈춘다. 

눈물이 멈춘다.


바람이 분다 서러운 마음에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글썽이던 눈물을 쏟는다

하늘이 젖는다 어두운 거리에 찬 빗방울이 떨어진다

무리를 지으며 따라오는 비는 내게서 먼 것 같아

이미 그친 것 같아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허무한 내 소원들은 애타게 사라져간다

바람이 분다 시린 한기 속에 지난 시간을 되돌린다

여름 끝에 선 너의 뒷모습이 차가웠던 것 같아

다 알 것 같아

내게는 소중했던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너에겐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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