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인간이 영위하는 조직과 사회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불안 앞에서, 지금까지의 주류 학문과 경영은 ‘인간 엔지니어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왔습니다.
20세기 초 프레데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을 필두로 하는 이 표준 방법론이 가진 세계관은 ‘정밀한 예측'이 가능한 세상입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이 세계를 정밀하게 파악, 디자인하고 그에 기반해 조직과 개인의 삶에 대한 성공의 표준을 만들면 다수의 '우리'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 표준을 따르면 된다." 는 것입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은 그 사상을 기반으로 우리의 정교한 행동, 나아가 정신까지 디자인하고 조율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세계와 이를 제대로 경영하기 위한 표준, 그 표준을 세우고 통제하고 명령하는 소수의 엘리트, 이를 정밀하게 수행하는 기계적 인간, 이것이 근 한세기 이상을 지배한 현대 인류의 ‘게임의 룰’ 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가요? 아니 애초에 정말 들어맞았던 적은 있었던가요?
‘과학적 관리법’이 가정하고 있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리 인간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지금을 사는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우리의 직장과 비즈니스, 개인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늘 불안에 쫓겨 삽니다. 소위 ‘성공의 표준’이 요구하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을 나와 남들이 알아주는 직장에 들어갔지만, 정작 나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 부품처럼 여겨질 뿐입니다.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정작 그 목표를 왜 달성해야 하는지는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8할은 운인데, 우리는 그런 기계적 방식으로 점수화 되고 분류되고 맙니다.
세월이 지나 어찌어찌 겨우 팀장의 자리를 달았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권위는 커녕 책임, 업무만 더 많아졌습니다. 꼰대 상사의 명령과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건 여전한데 내가 아래 팀원에게 그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동료를 포함한 많은 젊은 직원들이 자진해 회사를 떠납니다. 과거 협업했던 타 부서 동료가 창업을 제안한 적이 있지만 그땐 안정적 직장을 왜 버리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소위 대박이 났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 더 자주 그런 소식을 듣습니다. 더 이상의 승진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회사의 압박은 심해져만 갑니다. 애자일, 디지털 혁신, ESG 회사는 매번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압박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길들여온 거대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그간 회사의 질서와 요구에 순응해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변화,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개인의 삶은 또 어떤가요? 한번 상상해 봅시다. 불과 수년 전 다수의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부동산 경기 침체를 예견했습니다. 곧 일본의 80년대 부동산 버블붕괴와 유사한 시기가 올 거라 주장했습니다. 십 수년간 내 집 마련을 위해 저축을 해왔지만 뉴스를 접한 가족들이 말렸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무리해서 집을 사는 대신 전세를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그럴 때가 왔다고 공감했습니다. 그렇게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왜인 걸 불과 수년 사이 집값은 폭등을 했습니다. 이제라도 사야하나 부랴부랴 움직여보려 했지만 거듭되는 규제 속에 대출은 막혔습니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서울 집은 이제 언감생심 꿈조차 못 꾸는 가격으로 치솟았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주식과 코인 뿐일까? 주변에 인생역전을 한 스토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내 동료의 친구도 이미 투자에 성공해 회사를 그만 뒀다고 합니다. 나만 뒤쳐지는 것 아닌가 조바심에 뛰어들었습니다. 처음엔 소액을 주식과 코인에 투자했습니다. 2배, 3배 꺾일 줄 모르는 상승세에 ‘아 진작 올인할 걸’ 조바심이 났습니다. 결국 가진 재산을 전부 넣었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올라라’, 지금까지의 추세라면 나도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습니다. 각종 온라인 강의와 공부를 통해 자신감도 갖췄습니다. 그런데 왜인 걸 갑자기 시장이 무서운 기세로 추락합니다. 지금이라도 찾으면 본전은 찾지만, 3배 이상까지 찍힌 모바일 폰 화면의 숫자를 잊기 여간 힘든것이 아닙니다. 소위 전문가가 시키는 단타 거래로 잃었던 돈을 조금이라도 회복해 보려 하지만 어떻게 사면 내리고, 팔면 오르는 건지, 밤새 끝나지 않는 거래장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이던 일을 반복하기를 수개월, 통장은 마이너스에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입니다. 나는 늘 발버둥쳤지만 늘 뒤쳐지는 기분입니다.
과거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며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았던 공상과학 영화 매트릭스(감독: 더 워쇼스키스)는 기술에 지배된 인간 사회를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영화 매트릭스의 배경인 서기 2199년, 인간은 인공지능에 지배, 감금당해 인공지능의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한 에너지원으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뇌에는 ‘매트릭스’라는 프로그램이 심겨 있어 인간은 완벽한 가상현실을 실재라 믿고 살아갑니다. 이런 가운데 이런 지배적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 무리의 리더인 모피어스는 어쩌다 잠시 ‘매트릭스’ 바깥으로 나온 주인공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넵니다. 빨간약은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진실의 모습을 보는 것이고, 파란약은 질서있는 (착각의) 세계 속에서 남은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주인공 네오는 빨간약을 삼킵니다. 무지의 행복을 거부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진짜 현실과 마주하기로 한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빨간약’, ‘파란약’의 비유는 우리의 현실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테일러리즘 철학은 우리 인간에게 ‘파란약’을 권해왔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불안과 위기 앞에서 스스로가 가진 고유의 맥락을 마주하고 생각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훈련 대신 사고(思考)하는 바를 멈추고 오히려 관계와 맥락은 단절한 채 파편화된 과업, 행동을 마치 기계, 로봇처럼 수행하기를 장려하고 문화화해 왔습니다.
그 관성 때문일까,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파란약’을 찾아 헤매입니다. 시장은 ‘파란약’을 파는 사람들로 넘칩니다. 구하고자 하는 답이 정작 무엇인지도 모르는 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합니다. 책, 아티클, 강연, 워크숍, 컨설팅, 생산성 도구, 종교.. 유행하는 인스타그램, 유투브를 키고 내가 갈구하는 질문과 관련된 키워드만 몇 번 반복해서 쳐도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따라 수많은 그럴듯한 연관 정보, 컨텐츠, 광고가 끊임없이 전달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정답’과 ‘법칙’을 쏟아 붇지만, 갈증은 더 심해질 뿐입니다.
파란약의 세계, 성공과 행복의 길이 뚜렷하며 매끄러운 질서를 가진 세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내일의 주가와 부동산 가격, 비즈니스 시장을 정밀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내 성공과 행복을 대신해서 디자인하고 책임져 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과학적 관리법이 전제했던 인풋과 아웃풋이 비례하는 기계적 세계, 이를 지탱하는 (생각, 감정이 분리된) 기계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nphen Hawking은 2000년 초반 어느 회견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20세기는 물리학의 세기였고, 이제 우리가 생물학의 세기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복잡한Complex 것은 혼잡한Complicated 것과는 다릅니다. 혼잡한 시스템은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 보이지만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는 점에서 예측 가능합니다. 예컨대 비행기 조종은 매우 혼잡하지만 동시에 예측 가능한 단계를 밟기 때문에 매우 안전합니다. 우리가 그간 세계를 보고, 또 대응했던 방식은 ‘혼잡한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더 이상 지금의 기업환경과 시대 질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질서는 ‘혼잡함’을 넘어 완연한 ‘복잡성’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복잡계는 혼잡함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초기 조건이 동일하더라도 시스템 내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성 요소 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관계에 대한 모형을 만들면 혼잡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성 요소 간의 관계를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상호 작용으로 단순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잡계는 모든 요소들이 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단순화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복잡계는 일단 수많은 개별 구성 요소나 행위자가 모이면, 대개 그 개별 구성 요소나 행위자의 특성에서는 전체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고 그 특성으로부터 쉽게 예측할 수도 없는 집합적 특징이 드러납니다. 예컨대 우리는 단지 세포 집합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세포는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분자의 집합이라는 차원을 훨씬 넘어섭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 기업 환경, 조직은 철저히 이런 복잡계의 속성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내 친구가 어떤 방법으로 투자에 성공을 했다고 해서 그 친구와 다른 성격, 속성을 가진 내가 동일한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내가 아무리 혼잡함의 패턴을 읽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내 성공과 성장, 기회를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주식의 대 호황장에서도 돈을 잃는 무수한 사람이 있는 반면, 주식의 폭락장에서도 수익을 얻는 무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 모두가 어떤 정확한 비법을 깨우쳐 다음에 동일한 결과를 재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슈퍼스타 팀으로 구성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론칭한 IT서비스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초라한 팀으로 구성된 IT 제품에 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수년 전만해도 우리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에서 장기간 마스크를 쓰며 살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동시에 그러한 삶에 이토록 빠르게 익숙해질 것이라 예상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과거 경제 공황을 예견했다고 하는 전문가 중 일부가 코로나로 인한 최악의 디스토피아, 대폭락을 예고했지만 시장은 반대로 호조세를 이어갔습니다.
복잡계 질서의 시사점은 그간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 ‘과학적 관리법’이 가진 철학, 방법론이 왜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지를 설명해줍니다. 과학적 관리법의 가정으로는 ‘행위자들의 상호작용’, 그 능동적인 상호작용에 따라 부분의 특성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특성과 결과를 나타낸다는 복잡계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과학적 관리법의 전제와 실행에는 언제나 ‘인간’이 배제된 ‘인간’, 따라서 인간 특유의 ‘상호작용’이 배제된 세계가 있을 뿐입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 차를 타고 산비탈길을 오르던 도중 산바위가 굴러 떨어져 도로 앞을 가로 막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차를 잠시 세우고 ‘저 돌은 없는 거야, 허상이야.’라 되뇌고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를 힘껏 밟는 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영과 조직, 나아가 우리의 삶을 다룸에 있어 오랫동안 이 같은 관점을 견지해 왔습니다. 경영활동이 조직간 조직 내 인간의 상호 교류, 교감속에 이뤄짐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감정’, ‘개인성’을 배제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에 기반한 세계를 디자인하고 의사결정을 내려온 것입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고전 손자병법은 상대방과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를 불확실성, 불안의 시대와 싸우는 우리 인간의 생존 전쟁이라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진짜 룰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적 관리법의 세계, 그것이 가정한 인간에 대한 가정은 더 이상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빨간 약을 삼켜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복잡성의 세계, 그리고 그 안에서 생존하고 성장하는 인간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이 설령 우리가 기대한 '단순한 정답'이 아니라 어렵고 불편하고 지저분한 길을 제시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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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ary
우리 인생의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남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획기적인 비법이 있는 것 아닐까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불안과 기대를 아주 능동적으로 활용합니다. 한시간만 배우면, 혹은 한달과 같은 아주 짧은 시간만 배우면 경제적 자유도 누릴 수 있고, 삶과 경영을 정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강의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는 여전히 저를 포함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워낙 똑똑한 저 사람(들)이 주장하고 거기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투자를 하면 뭔가 있는 것이 분명해."라며 내가 잘 알지 못하고 사실 믿지도 못하는 것들에 나와 내 것들을 맡겨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비교적 최근 발생한 코인 루나 사태 역시 어쩌면 그런 전형적인 패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폐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글을 쓴 이후로 많은 분들의 요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켠 어렵고 여전히 내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았구나를 느낀 것은 여전히 제게 '그래서, 내가 처한 상황에서의 (단순한) 정답이 뭔가요?'를 묻는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단순한 해법을 시원하게 알려드리기 위해서, 일련의 글을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직, 나아가 삶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정답'은 없다, 그 알에서 깨고 나와 우리가 처한 문제를 직시하고 부딪혀야 한다. 그 길은 참 어렵고 복잡하고 지저분한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을 믿고 가치있는 '방향성'을 함께 논의해보면 어떨까? 이 중 구체적인 나의 상황에 맞춰 작게라도 시도할 것들에 대해 용기 내보면 어떨지를 제안하고 나누기 위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득 제가 제안하는 이야기들이 '그 의도를 전하기에' 너무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기만 한 것 아닐까하는 자기반성 역시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글의 중간 중간 제가 몸담고 있는 현업/현실에서의 구체적인 고민과 실사례 등을 이 Commentary를 통해 조금씩 엮어 전달해보면 어떨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의도가 잘 반영될지 스스로가 두렵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 부디 조금이나마 여러분들의 삶, 조직에 작더라도 실질적인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Book: 상효이재, 초개인주의 Over-Individualism, 한스미디어, 2022
장재웅, 상효이재, [네이키드 애자일] , 미래의 창,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