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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Aug 27. 2022

0-3. 여러모로 심리적인 안전을 갖기 요원하다.

불안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s-Beck


(0-2. 완벽한 팀을 만드는 과학적 비결에서 이야기 했듯, 많은 과학적 연구 결과는 완벽한 조직을 위해서는 '심리적 안전'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잠깐.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심리적 안전을 비로소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과는 별개로 조직에 이를 뿌리내리기는 점점 어렵고 힘든 환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여러 맥락의 높은 불확실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 초저금리의 초장기화 등의 사회경제적 현상은 더 이상 세계가 과거만큼 예측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020년 발발한 COVID-19 바이러스 확산 사건은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명하게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쉼 없는 변화, 불확실성이 당연한 세상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이미 검증되었다고 굳게 믿던 방법론, 지식은 쓸모 없어지고 누구도 가까운 장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다가올 최악의 상태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직장 내에서 기반을 공고히 할 것인지,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나 갈지, 예상치 않은 비용이 어디서 발생할지 하루하루 걱정에 시달리곤 합니다.


 동료들과 언제까지 같이 일할 수 있을지, 언제 내가 직장에서 쫓겨날지, 어떤 새로운 동료와 미래를 계획해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의 전문성과 지식, 경험을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퇴보한 것은 아닐까? 이 상황을 어떻게 더 버틸 수 있을까? 이것은 일시적으로 곤란한 상황일까 아니면 기나긴 위기의 시작일까?


 우리는 상황이 어떻게 발전할지, 자신감과 공포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하는 괴로움에서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 알 길이 없습니다.


 높은 불확실성은 자연스레 불안정을 낳습니다. 


 사회적 변화가 가져온 숨가쁜 역동성은 반성, 사유 등과 같은 정신적 활동에 대한 여유를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매일이 통제 불가능하고 불확실하며 위험하고 혼란스럽다고 여깁니다. ‘불안’이라는 요소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깊게 탐구한 독일 사회학자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Ernst-Dieter Lantermann)은 치밀한 네트워크에 갇힌 현대의 복잡한 사회 구조와 맥락, 그에 비롯한 극단적인 불확실성이 우리의 행동과 결정, 감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결국은 고도의 불안감이 개인과 사회 전반에 보편적으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i]


 결과적으로 수많은 기업, 리더, 구성원들은 ‘심리적인 안전’을 외치고 요구하면서도 동시에 극심한 ‘심리적 불안’을 느끼고 요구하는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현 시대를 4차산업 혁명의 시대, AI 인공지능의 시대라 규정하고 ‘기술’의 변화에 촉각을 맞추지만 그 시선의 초점을 ‘사람’이라는 주체,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맞추어 다시 본다면 지금은 감히 ‘불안 사회’라 규정할 만한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Harold Maslow)는 ‘안전욕구’를 가장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욕구로 보았는데, 먼 과거에 이미 종식된 듯했던 ‘바이러스의 시대’마저 코로나를 필두로 다시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극심한 불안 속에서 조직과 개인이 보이는 일반적인 양태는 대체로 두 가지 갈래로 나뉘는 듯 합니다.


 대표적인 모습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지나치게 자기 방어적이고 급진주의적인 태도와 문화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학에 따르면 여러 불안요인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동원되는 보호 방식을 통해 편안함을 얻고자 합니다. 이럴 때 나타나는 것이 ‘데마고그(Demagogue)*’ 입니다


*데마고그(Demagogue): 대중에게 과대한 공약을 내세운 선동으로 권력을 획득, 유지, 강화하는 정치가를 뜻하는 말로 여기서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 기제를 총칭해 언급했다..


 다시말해 간편한 해결책을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고 자신을 따르도록 사람을 선동하는 기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를 과학적 용어로는 단순화(Reduction of Complexity)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제에 물든 다수 에게 신념과 느낌, 사고와 행동의 급진화라는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자기 급진화 현상에서 다양한 의견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고 자신의 믿음은 절대적인 것으로 고정됩니다. 이 특수한 감정과 믿음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립된 커뮤니티가 형성됩니다. 이들은 자기집단에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동일시합니다. 의견이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협상, 타협을 엄격하게 거부합니다.


 종교적, 정치적 극단주의나 인종주의, 혹은 도덕적 절대주의 같은 형태를 떠올리기 쉽지만 가깝게는 혐오, 루머, 가짜뉴스, 익명성에 기댄 악플 댓글, 그리고 셀피 문화와 같은 자기과시 현상도 이와 같은 범주에 해당합니다.

 최근 퇴사 컨텐츠의 봇물 역시 이런 흐름의 일부가 아닐까 합니다.*

만화 이누야사에 나오는 장면을 패러디에 인터넷에 확산되었던 퇴사 '짤'

 
 진정한 자아 찾는다는 명목으로 과감히 선택한 퇴사는 때때로 본디 목적 달성 보다 현실도피, 사회 안전망 부족에 따른 (실패에 대한) 또다른 극심한 불안과 방황으로 귀결되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결코 바람직한 대응방식이 아니지만 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하지 않는 이상 다분히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특히 개인의 차원에서 생산적인 대안이 마련되어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뉴욕 타임즈 비평가 미치코 카쿠타니(Michiko Kakutani)현대 네트워크 기술이 누구든 진실을 밝힐 수 있는 힘도 주었지만 동시에 진실에 무관심한 채 자신 만의 편향된 시각,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의 고립된 커뮤니티 문화를 빠르게 형성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평합니다.[ii] 결과적으로 사회 공동체 내 증오와 혐오의 총량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일련의 현상은 기업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극심한 불확실, 불안정성의 늪에서 경영자는 오롯이 자신의 과거 성공경험에 집중하기 쉽습니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경영자는 자신이 그동안 겪은 위기에서 어떤 판단과 행동을 했고 그것이 어떻게 성공에 이르렀는지를 곱씹으면서 모든 신경을 그 감각을 되살리는 데 집중합니다. 

 그 가운데 모든 리더, 구성원이 가능한 자신의 도플갱어가 되길 바랍니다. 때문에 자신의 의사결정의 넓이와 깊이를 급진적으로 확장합니다. 다양한 의견은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거) 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고정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 내 다양성은 빠르게 소멸하고, 문화는 급격히 경직됩니다. 얼핏 조직은 빠르게 한 몸처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움직임은 대체로 둘 중 하나입니다. 뜨거운 불구덩이를 향해 맹목적으로 날아들거나, 거대한 바위가 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거나.


 자기 방어적이고 급진주의적 태도와 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양태도 있습니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철저히 타자, 타집단에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이런 유형은 자기 자신 앞에 놓인 일생일대의 위기 혹은 기회 앞에서 조차 대신 책임져 줄 수 있는 누군가, 무언가를 필요로 합니다. 거의 모든 문제상황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책임을 회피합니다.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과 조직에 있어 가장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은 ‘대세’를 따르는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 그러한 마음, 문제에 차분히 집중하기 이전에 이를 대신 고민하고 대신 치유해줄 것 같은 누군가 혹은 무엇을 찾아 정답을 구합니다. 이 때문에 소위 용하다는 점집은, 단순한 성공비법이 있고 이것만 따라하면 된다는 클리셰Cliche**를 충실히 따르는 컨텐츠는 세대와 시대를 막론하고 흥행하기 마련입니다.


**클리셰(Cliche): 진부한 표현이나 상투적 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기업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기업들은 ‘4차 산업혁명’,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포스트 코로나’ 등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상징하는 개념 앞에서 조직관리, 일하는 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를 발빠르게 좇기 위해 거대한 예산을 들여 컨설팅, 교육, 다양한 도구를 도입합니다. 하지만 거기 까지입니다. 정작 조직이 가진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문제를 진실하게 진단하고 개선하고 혁신해 진정한 변화를 이루는 기업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기업 맥락에 맞는 새로운 혁신보다는 유행하는 베스트 프랙티스를 찾아 보급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그것은 어김없이 실패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은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야구선수가 동생을 구하려다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감빵’에 수감되면서 겪는 일을 다룹니다. 드라마는 감옥이라는 사회를 무대로 현실에 있을 법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똘마니’라는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똘마니는 조폭 출신으로 자신이 모시던 형님을 끔찍하게 위하고 주인공을 극도로 증오하는 2인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님을 위한다는 신념으로 그와 대립했던 주인공을 살해하려 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모실 형님이 부재한 상황이 되자 맹목적 신념은 흔들립니다. 그는 또다른 형님을 찾아서 충성할 때 비로소 안정을 찾습니다. 때문에 과거의 자신의 신념은 온데 간데없이 오롯이 주인공에게 충성하는 2인자가 됩니다. 그가 의존한 새로운 형님이 주인공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자유의지보다는 타인의 말과 행동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의존의 대상이 곧 급진적인 신념이 되고 맙니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주인공 김제혁 선수와 '똘마니'


 이처럼 급진적인 자기방어와 책임 없는 의존이라는 불안 앞에서 보이는 두가지 유형의 모습은 에고의 강도가 서로 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뱀이 자기 스스로를 먹는 것처럼 근본적으로 하나의 형상, 반복되는 고통과도 같습니다. 모두 변화를 거부하는 불안장애의 거울과도 같은 단면일 뿐이 아닐까요?

 스스로를 제대로 파악하고 돌보지 못한 채 철저히 남에 기대어 만병통치약을 갈구하는 사람은 가짜 약을 진짜로 둔갑시키는 교활한 집단을 만나 빠르게 급진화 될 수 있습니다. 자기 급진화에 갇혀서 절대적인 신념과 철벽 같은 자기방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그 신념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기에 어떤 이유로든 그 신념이 무너지면 기댈 의존의 대상을 찾아 헤매게 됩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기술변화의 물결, 코로나(COVID-19) 바이러스 시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조직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깊은 불안 앞에서 나는 좀 더 당당할 수 없을까? 짙은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서 우리는 좀 더 의연할 수 없을까? 나아가 내가 몸담은 조직이 좀 더 건강하고 안전하게 생존, 성장할 확률을 높이는 길은 없을까?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시간과 비용을 소비합니다. 책, 아티클, 강연, 워크숍, 컨설팅, 생산성 도구, 종교.. 유행하는 인스타그램, 유투브를 키고 내가 갈구하는 질문과 관련된 키워드만 몇 번 반복해서 쳐도 인공지능(AI) 알고리즘에 따라 수많은 그럴듯한 연관 정보, 컨텐츠, 광고가 내게 끊임없이 전달됩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고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혹시 불안을 잊기 위해 철저히 기댈 의존의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매우 그럴듯하고 자극적이고 급진적이며 그만큼 단순한 ‘정답’이 있다는 환상을 좇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오늘도 수많은 ‘정답’과 ‘법칙’을 우리에게 쏟아 붇지만, 갈증은 더 심해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일까요? 인간, 사회는 그토록 오랜 시간 위기, 불안을 겪어 왔음에도 왜 우리 다수의 대응과 행동은 매우 공격적인 한편, 피상적이고 수동적인 양태를 띌까요?


 정신분석학자 이사벨 멘지스 리스(Isabel Menzies Lyth)는 불안과 걱정에 대처하는 조직과 사회의 대응 메커니즘을 연구했습니다.[iii] 그는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상처, 죽음이 빈번한 병원 조직의 간호사 집단을 대상으로 이들이 두려움과 불안을 어떻게 견디는지를 관찰했습니다. 병원 조직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징은 지나치리만큼 일을 분절시키고 과업을 체크리스트화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각 간호사들은 병동의 일을 잘게 나누어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그 일만 수행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 간호사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채혈만 시행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떤 환자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치료를 받고 있고 또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초점은 간호사와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또 동시에 스스로와 환자를 비인격화하고 개인의 특수성을 차단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런 방어 시스템 속에서 간호사들은 환자를 이름이 아닌 침대번호나 질병이나 질병에 걸린 장기로 환자를 대했습니다. 10번 침대의 간, 15번 침대의 폐렴. 이렇게 사람을 사물화, 대상화(對象化, objectification)하는 관행이 고착됐습니다.

 물론 간호사처럼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어떤 직업군은 특별히 개인으로서의 자아와 직업적 자아간의 적절하고 프로페셔널한 분리가 필요합니다. 감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고, 지나친 개입을 자제해야 합니다.

 간호사가 감정과 마음 관리,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를 높은 수준으로 해야 한다는 사명 앞에서 이 시기 병원 조직은 일을 분절하고 사람을 비인격화하는 것에서 그 해법을 찾았습니다. 멘지스는 이런 방법이 주류가 되고 관행이 되면서 성숙하게 개인과 직업 정체성을 분리하는 좀 더 근본적이고 고도화된 훈련은 거의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대상화함으로써 얻는 또다른 고통과 번민, 불안이 병원 조직을 가득 매웠음에도 이런 진실은 시스템에 의해 암묵적으로 묵인되고 부정되었습니다.


 멘지스의 분석은 19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조직 경영, 그리고 사회 시스템을 이끌었던 테일러리즘, 관료시스템의 특징과 궤를 같이합니다. “불안하지요? 어렵지요? 당신은 생각하지마십시오. 그저 우리가 고심해서 설계한 복잡한 매뉴얼과 체크리스트, 그리고 우리 지시에 시키는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괜찮습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불안과 위기 앞에서 스스로가 가진 고유의 맥락을 마주하고 생각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훈련 대신 사고(思考)하는 바를 멈추고 오히려 관계와 맥락은 단절한 채 파편화된 과업, 행동을 마치 기계, 로봇처럼 수행하기를 장려하고 문화화해 왔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20세기부터 최근까지도 지속된 사회적 문화적 관행에 우리가 그토록 적응하고 내 것으로 삼고 싶어하는 21세기의 디지털 기술, 문화가 결합될 때 부작용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인터넷 속에서 살고 그것을 벗어난 삶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흐름은 우리 뇌 구조를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경영컨설턴트이자 IT미래학자인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인터넷, 모바일 스마트폰 사용의 확대가 우리의 뇌를 소모시키고 위험한 방향으로 변형시켰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최신 디지털 IT기술은 우리의 뇌를 즉각적인 반응과 새롭고 자극적인 정보에만 민감하게 만들어 뇌 속 깊은 생각과 창의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은 억제시킨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디지털 도구와 정보에 자주 노출될수록 인지적 집중력, 논리적 추론, 추상적 사고, 새로운 개념에 대한 이해, 문제해결과 같은 정신적 기술은 약화되고 감정적 불안은 증대되는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이쯤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 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 한번 주변을 둘러볼까요? 나, 그리고 내가 이끌거나 내가 속한 조직은 여전히 과거 그대로인데 세상은 빠르게 변해 우리가 예측했던 것들이 도무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언제 우리가 잘못될지 모르는 이 환경 속에서 또 누군가는 그 변화의 등에 올라타 성공한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불안하지 않은가요? 초조해진 우리는 다양한 온 오프라인 강의, 세미나, 책을 뒤적이며 이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할지 공부하려 합니다. 수많은 원칙과 법칙을 배워 그대로 따라해봅니다. 새로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또 탐색합니다.

 하지만 마치 신기루를 좇는 것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잘 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여러 이유들이 얽혀 불안만 증폭될 뿐입니다. 어떤 누군가는 남들이 보기에 그 ‘변화의 등’에 가까스로 올라탄 승리자로 보일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조차도 또다시 언제 떨어질까 불안한 마음을 숨기면서 자기방어를 위해 애써 자신을 화려포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매끈한 과대포장을 보며 좌절하거나 질투하거나 동경하며 포장을 덧씌우는 일을 반복합니다.


오늘날, 불안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초상입니다


 


commentary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안전이 우리의 삶과 조직의 생산성과 성과, 성장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과 별개로 우리를 둘러싼 구조적인 환경이나 문화는 '여전히', 때로는 '오히려' 심리적 안전을 갖기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는  아닐까..하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높은 불확실성이 불안을  자극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닥친 (높은) 불안을 성숙하게 수용하고 대면하며 현명하게 활용하기보다는  불안을 불편하고 당장이라도 없애야  것으로 여기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은  같습니다. 불안 앞에서 도무지  조율되지 않는 개인, 조직의 짜증과 분노,  등이 비수가 되어 타인을, 조직을, 그리고 가장 크게는  자신을 할퀴고 물어뜯어 돌이킬  없는 생채기를 내는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합니다.


 우리는 분명, 더 많은 정보, 더 나은 기술과 도구, 더 나은 방법론을 얼마든지 공짜로도 획득할 수 있는 더 나은 시대를 살고 있는데 왜 어떤 측면에서는 조금도 더 나은 삶, 조직을 구축하지 못할까?라는 질문, 문제의식에서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했습니다. '점점 더 불안하기 때문에' 우리, 조직이 응당 하는 말과 행동의 패턴을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점검하면서 자기만의 답(가설)을 찾아보았으면 하는 마음과 바람을 글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i] 에른스트 디터 란터만Ernst-Dieter Lantermann저/이덕임 역, 불안사회: 혐오와 광신으로 물든 현대사회를 말하다, 책세상, 2019

[ii] 미치코 카쿠타니(Michiko Kakutani)저(김영선 옮김), 진실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돌배게, 2019

[iii] Social Systems as a Defense Against Anxiety: An Empirical Study of the Nursing Service of a General Hospital, isabel menzies lyth, a shortened version of the original – Human Relations, 13:95-121(1960)


Book: 상효이재, 초개인주의 Over-Individualism, 한스미디어, 2022

장재웅, 상효이재, [네이키드 애자일] , 미래의 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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