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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효이재 Sep 10. 2022

2 [좋은 욕망]이 필요하다.

조직의 관점에서 좋은 욕망이란 과연 무엇일까? 

김동률, 여름의 끝자락

 

 (앞선 글에서 다뤘듯) 인간이 '욕망'한다는 고유의 특성 자체가 어떤 집단의 끈질긴 생존과 기하급수적인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도시]입니다. 물리학 데이터에 따르면 도시는 인간의 욕망 그 자체로 창발(혁신)하고 열린 성장을 합니다. 도시는 부분적이고 또 단기적으로 도시 계획에 실패하거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같은 슬럼화를 겪기도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그 위기의 웅덩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른 인재의 유입과 창발로 메워져 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도시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탄력성을 가지고 복잡 적응계로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속성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게시된 글 중 [도시는 살고 기업은 죽는다] 편을 참고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사실 기업과 그와 유사한 형태의 단일 목적을 가진 기관, 조직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기업은 설립자, 설립 목적이 존재하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재화, 재화를 얻을 수 있다는 가치를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이런 기업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도시와 같이 무작위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렇기에 테일러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개개인의 욕망을 억누르고 기계화, 계약화해 기업의 성공을 관리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을까요? 만약 수많은 개개인이 자기 고유의 욕망을 어느정도 충족하면서도 동시에 다수가 공감하고 열망할 만한 공동의 욕망을 바라보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문화 역사 안에서 이미 그런 사례와 그것이 가진 폭발적인 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이나 독재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만 떠올려 봐도 그 상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만큼의 치명적 위험도 존재합니다. 만약 그 공동의 ‘욕망’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해가 되는 방향을 향한다면 폭발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치정권의 수립과 세계대전이 바로 그 파괴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자기 욕망을 갖는 것을 넘어 (공동의) ‘좋은 욕망’에 대한 고민이 동시에 필요합니다.


 프랑스 소설가 장 지오노Jean Giono가 1954년에 발표한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은 20세기 초반 프랑스 프로방스 인근 고원지대를 오르는 젊은이가 등장하며 시작됩니다.[1]

 소설의 화자인 그는 야생 라벤더밖에 자라지 않는 해발 1200~1300미터의 헐벗은 황무지의 한 농가에서 어떤 남자와 마주칩니다.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낸 후 속세를 떠난 그에게 특별한 자신만의 소명이 있었는데 바로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어 숲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소설 속 화자는 그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5년이 지난 시점에 그 숲을 다시 찾습니다. 놀랍게도 나무를 심는 남자를 다시 만났고 그는 작은 숲을 일군 상태였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이후에도 매년 그를 방문해 그가 만든 작은 기적의 목격자가 됩니다. 남자의 행위는 40년 동안 계속 되었고 결국 만명도 넘는 사람들이 삶을 일구는 거대한 숲, 마을을 이뤘습니다. 소설 속 화자는 “몰라보게 달라진 토박이들과 새로 이주한 사람들을 합쳐 만 명도 넘는 사람들이 그 덕에 행복을 누렸다”라고 전하며 ‘위대한 영혼은 오직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고결한 실천’을 찬미했습니다. 소설 출간 이후 꽤 오랫동안 많은 독자가 감동했고, 이 소설은 프랑스 출신 에니메이션 작가 프레데릭 백Frédéric Back,에 의해 1987년에 30분 남짓 분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재창조되어 다시한번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2]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좋은 열망과 확신이 어떤 힘을 갖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좀 더 극적으로 현실세계에서 이뤄진 바 있다는 것입니다. 1980년 대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은 기근이 지속되는 황무지 그 자체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가전제품 가게를 운영 중이던 야쿠바 사와도고는 어느날 자신의 고향인 이 사막을 좀 더 살 만한 지역으로 바꾸겠다는 열망을 품었습니다. 그는 가게를 팔고 재산을 정리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괭이와 종자를 들고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사와도고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릴 적 그는 공부를 잘하진 못했지만 나무와 식물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탐구했습니다. 모두가 황무지가된 사헬지역을 떠날 때 그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끌렸던 나무와 식물을 가지고 고향을 살리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유럽인이 아프리카를 살리겠다고 취한 근대식 농법 – 농기계, 비료, 살충제를 활용한 – 이 사막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이(zai)’라 불렸던 사헬 지역의 오랜 전통 농법을 되살렸습니다. 메마른 땅에 일일이 20센티미터 깊이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구멍하나에 씨앗을 하나 넣은 뒤 다시 흙으로 덮었습니다.하지만 그의 실험을 실패했습니다. 오랫동안 말라붙은 땅은 씨앗 알갱이를 바짝 말려 버렸습니다. 사와도고는 실망하기보다는 새로운 배움을 얻었습니다. 기존의 전통방식에서 방법을 조금 바꿨습니다. ‘자이’ 구멍을 넓히고, 잎사귀나 가축의 똥, 혹은 불타고 남은 재로 씨앗을 감쌌습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흙으로 두꺼운 층을 쌓고 그 위에 돌멩이를 쌓아 줄을 세웠습니다. 그 안에 비가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다음 일어난 일은 마치 장 지오노의 소설 같습니다.

 의미있는 첫 수확 이후 몇 십년간 사와도고는 흔들림 없이 경작지를 늘려 나갔습니다. 조금씩 사막에 풀이 돋고 나무가 자랐습니다. 수분이 저장되면서 우물에도 물이 고였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마을로 돌아왔고 수백 헥타르가 사막에서 경작지로 변모했습니다. 사와도고의 명성은 국경을 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찾아와 그의 새로운 경작법을 배워갔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주간지 [디 차이트]에도 장문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와도고를 취재한 안드레아 예스카Andrea Jeska 기자는 사와도고에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이야기를 들려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밝혔습니다.[3]


 이 실화가 놀라운 것은 장 지오노가 『나무를 심은 사람』출간 후 독자의 질문에 보내는 답장에서 지어낸 냉정한 현실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장 지오노는 나무를 심은 사람과 그 숲이 그 후에 어찌되었냐는 독자의 질문에 그의 업적이 ‘핵폭탄 저장고나 사격장, 석유 저장소’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와도고의 숲 역시 비슷했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던 불모지가 매력적인 딸이 되자 정부가 숲에 개발 허가를 내준 것입니다. 애써 키운 나무의 대부분이 베어지고 말았습니다. 사와도고는 항의도 해봤지만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 실화가 좀 더 놀라운 것은 냉정한 현실 앞에서 현실의 사와도고가 보여준 태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단면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좋은 열망 혹은 바른 확신’, 나아가 기업이 추구하는 목적 혹은 목표의 본질입니다. 오랫동안 쏟아 부은 노력과 열정, 인내심, 끈기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사와도고가 낙담하고 포기할 법도 했습니다. 엄청난 분노로 화병에 걸리거나 혹은 자포자기해 우울증에 빠졌다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와도고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 역경 앞에서 그가 하는 행동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는 그저 발길을 옮겼습니다. 다른 황무지를 향해 아무도 오려 하지 않는 곳에 다시 구멍을 팠습니다. 작은 구멍에는 기장을 심고, 큰 구멍에는 모종을, 아주 큰 구멍에는 바오밥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와서 내 숲을 베어가면 우리는 새로운 숲을 일구면 돼”


 조직의 관점에서 좋은 열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체코 출신의 극작가이자 인권운동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공화국의 초대대통령을 역임한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이렇게 말합니다.


 “희망은 어떻게든 잘 될 것이란 믿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가치가 있으리란 확신이다. 그게 잘되든 말든 상관없이.[4]


 흔들림 없는 희망, 가치에 대한 추구가 해피엔딩을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오노의 소설, 그리고 현실의 사와도고, 하벨에게서 엿볼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가치 있다는 확신 지키는 태도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열망이란 하벨의 정의에 가치가 향하는 방향을 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조직은 그 욕망을 집단적인 열망으로 모으되 그것이 사회적 가치를 향하도록 – 최소한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 방향을 향하도록 – 함으로써 기계적 노동 이상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됩니다. 


 조직이 이런 동력을 가질 수 있다면 예상하지 못한 위기 앞에서 적어도 좌절하거나 도망치거나 속절없이 무너지기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References


[1] 장 지오노Jean Giono,『나무를 심은 사람 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 1953 / 프레데릭 백 Frederic Back 감독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은 사람 The Man Who Planted Trees』, 1987

[2] 프레데릭 벡의 '나무를 심은 사람' 영상: 30분짜리 애니메이션

[3]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 (이지윤 옮김),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Zuversicht 인플루엔셜, 2020 (사와도고 사례 62p~70p 재인용)

[4] 울리히 슈나벨Ulrich Schnabel (이지윤 옮김),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Zuversicht 인플루엔셜, 2020 (사와도고 사례 60p~61p 재인용)


Book: 상효이재, 초개인주의 Over-Individualism, 한스미디어, 2022

장재웅, 상효이재, [네이키드 애자일] , 미래의 창,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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