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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준 Mar 10. 2023

제 1계 - 만천과해(1)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만천과해(瞞天過海)는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넌다는 의미로 36계 중 제1계이다.


 상대가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것을 역이용해 그 틈을 비집고 승리를 거두는 계책이다.

‘만천과해’ 라는 말은 명나라 때 쓰여진 영락대전에 실린 당태종 이세민(民, 599~649)과 설인귀(貴, 613~683)의 일화에서 유래했다.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떠난 당태종이 발해(海,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의 바다, 훗날 대조영이 발해군왕으로 책봉되어 나라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중원에서 나고 자라 바다를 처음 접한 당태종은 처음 바다를 보고선 겁에 질려 배에 오르길 주저했다. 수십만 대군의 총사령관인 황제가 주저하자 기세등등했던 원정군의 사기는 바닥이 되었다. 더군다나 당태종은 바다를 안전하게 건널 방법을 강구할 때까지 원정을 무기한 보류하였다. 황제가 직접 참여하는 전쟁인데, 바다가 무서워 원정을 보류하다니. 당시 당나라군의 허탈함을 알 법도 하다.

당태종 이세민(좌)와 설인귀(우). 사실 천책상장(天策上將)으로 불릴만큼 전쟁의 신으로 칭송되던 당태종 이세민이 고작 바다에 겁을 집어먹었을 리는 없지 않을까.

  원정이 무기한 보류되자 장수들도 안달이 났다. 특히 당태종 휘하의 장수이자 원정군의 책임자 중 하나였던 장사귀(張士貴)는 이를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던 중,  당태종의 최측근이었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설인귀는 젊지만 지략이 출중한 장수이니 한 번 찾아가보라 권유한다. 아니나 다를까 설인귀는 웃으며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 걱정마라며 장사귀에게 꾀를 하나 내어준다.


다음날, 장사귀는 당태종에게 어촌의 늙은 거부가 알현을 청한다고 아뢰었다.(판본에 따라 영험한 도사라고도 한다.) 그 거부가 막대한 군량미를 원정군을 위해 기부하였다는 말도 지 않았다. 과연 당태종이 해변에 이르자 1만 호나 되는 집이 모두 화려한 비단으로 치장되어있었고 진귀한 연회가 마련되었다. 오랜 전쟁 준비로 지친 황제와 장수들은 며칠이나 연회를 즐겼다.  그런데 어느날 밤, 세찬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들렸다. 연회를 즐기던 주안상이 엎어지고 주위가 흔들리는 바람에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백전노장 당태종은 본능적으로 적의 기습이라 생각하고 잠에서 깬 뒤 집을 감싸던 장막을 걷어 상황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나 장막을 걷은 당태종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기습한 적은 커녕, 사방에는 푸른 파도만 넘실대고 있질 않은가. 당 태종은 배 위에서 이미 발해를 건너고 있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설인귀는 미리 당태종이 탈  배 위에 흙을 깔고 장막을 펼친 후, 배에서 며칠간 연회를 준비하였다. 마치 배를 육지와 같이 만들어두고 장막을 펼쳐 바다임을 모르게 속였던 것이다. 설인귀의 꾀는 잘 맞아떨어졌다. 여기에서 하늘(천자, 황제)를 속여 바다를 건넜다. 라는 말이 유래했다. 황제를 속였지만 당태종은 설인귀의 지략임을 알고 웃어넘겼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에서 요하를 지나 요동성을 침공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넌 적이 없었고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설인귀의 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생겨난 설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거나 하늘과 같은 황제를 속이고 바다를 건넜다고 하여 '만천과해'라는 말의 어원이 만들어졌다. 다만 1계인 만천과해에서부터 남북조 시대의 단도제보다 훨씬 후대의 사례이기에 36계를 단도제가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다.

 

 사실 만천과해의 사례로 이보다는 삼국지의 태사자(太史慈, 166~206)가 보여준 일화가 더욱 유명하다. 태사자는 본래 청주(靑州, 지금의 산동성 일대) 동래군 황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 그는 군(郡, 한나라 시대 지방 행정단위로 주州의 하위 단위)의 관리로 일했다. 이때 주(州, 한나라 시대 지방 행정단위로 오늘날 중국의 성省과 같다.)와 군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중앙 조정에 먼저 이 분쟁을 알리는 쪽이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태사자가 속했던 군(아마도 동래군)은 한발 늦었는데 그는 재빨리 수도인 낙양으로 가 주의 관리를 속이고 잠깐 공문을 보자고 하더니 이내 칼로 찢어버렸다. 당연하게도 주의 관리가 노발대발하여 태사자를 위해하려하자 태사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당신도 공문을 내게 뺏기고 훼손까지 당하였으니 돌아가봐야 무사할 수 없다. 그러니 같이 도망가자."


주의 관리는 이미 한 차례 태사자에게 속았지만 태사자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같이 도망가게 된다.

하지만 태사자는 같이 도망가던 중, 주의 관리를 버리고 혼자 낙양으로 급히 돌아가 군 입장에서 쓰여진 공문을 올렸다. 이를 알게 된 청주에서는 뒤늦게 다시 관리를 보냈으나 담당 관리는 이미 공문이 접수되었다는 이유로 공문을 받지도 않았다. 이로 인해 결국 군이 주와의 분쟁에서 이기게 되었다. 태사자는 이를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군의 상급부서인 주를 농락한 것이였기에 후환이 두려워 바다 건너 요동으로 피신한다. (재밌게도 위 당태종의 일화와 같이 발해를 건넜을 것이다.) 이때 홀로남은 그의 모친은 북해를 다스리던 공융(孔融, 153~208. 그 유명한 공자의 후손이다.)이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태사자(太史慈, 166~206, 삼국시대 오나라의 명장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으나 마흔 살을 겨우 넘기고 죽고 만다. 소설과 달리 적벽대전 이전 죽고만다.

 

 당시 태사자가 살던 한나라는 무척 혼란한 시기였다. 184년,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으로 하북(황하 이북)이 쑥대밭이 되어버렸고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황건적은 반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각지에서 잔당들이 반란을 지속하며 지방을 약탈하였고 부유했던 지역인 청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건적 잔당의 수괴 중 하나인 관해는 수만 명의 황건적을 이끌고 청주 주변을 노략질하였는데 공융이 있던 북해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해는 결국 북해성을 포위하였고 소식을 들은 태사자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북해성에 뛰어든다.


 하지만 아무리 태사자가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하여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황건적을 모두 물리칠 수 없었다. 태사자는 당시 가까이 있던 평원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劉備, 161~223, 우리가 아는 그 유비 맞다.)에게 원군을 청하기 위한 사자(태사자라서 사자?)로 자원한다.

 

코에이 게임인 삼국지14의 태사자, 고유 전법(스킬)으로 만천과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마 이미 성을 포위한 황건적을 뚫고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기엔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하던 태사자는 말을 달려 포위망을 뚫을 생각은 하지 않고 매일 성문 밖으로 나와 활 쏘기 연습을 했다. 웬 우람한 무장이 활을 들고 나오자 처음에는 경계하던 황건적도 며칠이 지나자 태사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매번 활쏘기만 몇 번 하다가 성문 안으로 들어가곤 하여서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바로 그때 태사자는 경계가 누그러진 황건적의 포위망을 돌파, 번개같이 말을 달려 유비에게 향했고 마침내 유비가 이끄는 3천 명의 원군과 함께 북해성으로 돌아와 관해를 물리치고 어머니의 은혜를 갚는다.


 태사자는 이렇듯 상대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그 틈을 활용해 결국 승리까지 쟁취해냈다. 그렇다면 영업 현장에서는 어떠한 상황에서 '만천과해'를 응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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