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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Apr 20. 2024

이기는 힘.

  세상에는 한 번 내뱉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말이 몇 가지 있다. 장난이었다며 넘기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다시 주워 담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말. 가장 쉬운 예로 우리 이제 헤어지자 와 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말이 아니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말이 하나 있는데 오늘 너희 집에서 자고 갈까? 라는 말이다. 이 말은 친구 사이에서도 연인 사이에서도 꽤 설레는 말인데 진진은 오늘 하하에게 이 말을 해버렸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고 하하 집에서 가져갈 게 있어 함께 버스를 타고 하하 집으로 향하는 도중 진진은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내일은 진진도 하하도 쉬는 날이고 집에서 자나 여기서 자나 늦게 일어날 건 뻔하기에 별 고민 없이 하하에게 묻는다.


"아 오늘 자고 갈까? 그냥 엄마한테 자고 간다고 하고 나올걸."


 이 말을 들은 하하의 눈빛은 순간 반짝거린다. 하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진진과 편의점을 들러서 맥주를 사고, 함께 과자를 까먹으며 넷플릭스까지 보고 있다. 하하는 너무 좋다며 얼른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진진을 재촉한다. 진진은 저 말을 내뱉은 동시에 살짝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하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버스에서 내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옆에서는 여전히 하하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진진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큰 무리 없이 엄마의 허락을 받은 진진은 전화를 끊자마자 고민하지 않고 하하와 함께 편의점으로 향한다. 이 둘의 발걸음은 매우 가볍다. 한밤중에 외박을 허락받는 일은 하루가 끝나감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하의 집에 도착해 진진은 하하의 잠옷을 빌린다. 이번에 하하가 건네주는 잠옷은 분홍색 체크무늬 잠옷이다. 하하에게는 여러 벌의 예쁜 잠옷이 있다. 분홍색 잠옷, 하늘색 잠옷, 체크무늬 잠옷, 헬로키티 잠옷까지... 진진은 하하의 잠옷을 거의 종류별로 다 입어본 듯하다. 둘은 깨끗하게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미리 시켜 둔 치킨을 기다린다. 혼자 먹어도 맛있는 야식이지만 같이 먹는 야식은 두 배로 더 맛있다. 무엇보다 즐거움은 두 배로 늘어나고 죄책감은 반으로 줄어든다. 함께하는 동료가 있기 때문이다. 서로의 즐거움에 동참하기 위해 칼로리 걱정은 내일로 미뤄두기로 한다. 하하는 평소에 보고 싶었지만 혼자 보기에는 무서워서 엄두를 못 냈던 '기생수'라는 드라마를 치킨과 함께 볼 드라마로 선정한다. 둘의 시선은 치킨을 향했다가 기생수를 향했다가 바쁘다.


 기생수는 인간의 뇌를 지배해 결국은 인간의 신체 전부를 차지하는 기생생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어 눈으로는 식별이 불가하지만, 말하는 것, 표정을 짓는 것 등은 아주 어색하다. 이들은 인간들 사이에 숨어 인간인 척하며 살아가는데 기생수는 기생수를 알아본다. 서로를 알아봤을 때 동족임을 확인하는 질문이 있는데 마치 번역기가 말하는 것처럼


"동족인가-?" 라고 묻는다. 그 장면을 본 하하와 진진은 서로를 쳐다보며 똑같이 묻는다.


"동족인가-?"

"동족이다- 방귀라도 껴줄까?"


 서로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은 뒤 다시 드라마에 집중한다. 기생수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인간의 뇌를 지배하고, 인간에게 기생해 생존하라는 단 하나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생수. 정말 그게 다인가? 존재의 의미가 그것뿐이란 말인가? 이런 의문을 품는 기생수들에게 목사 기생수가 나타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다. 우리 존재의 의미는 기생수들이 들키지 않고 인간 사이에 숨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것. 서로를 지켜주는 것. 그렇게 기생수만의 조직을 만들어 간다.


 기생수와 인간의 싸움이 격정적으로 번질수록 하하와 진진은 침을 꼴깍하고 삼키게 된다. 무엇보다 기생수들이 너무 징그럽게 생겼으며, 극의 분위기가 한밤중에 보기에는 무섭다. 둘은 손을 꼭 잡고 기생수를 본다. 손을 꼭 잡고 물을 마시러 간다. 그런 자기들이 웃겨서 잠시 웃는다. 그리고 다시 무서워하며, 무서우니까 손을 잡으며 기생수를 본다.


 하하와 진진이 손을 잡는 동안 드라마 속에서는 동족인가-? 하는 질문이 무색해질 만큼 기생수가 기생수를 배신하고,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누가 동족이고 누가 적인지가 흐릿해진다. 결국 누가 이기냐고? 인간도 아니고 기생수도 아닌, 서로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쪽이 이긴다. 진진은 저 한마디를 위해 이렇게 장황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 걸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혹은 이만큼 장황한 스토리가 필요한 만큼 중요한 한마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하는 이런 진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대한 진진에게 딱 붙어서 기생수를 보고 있다.


 진진과 하하는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에 든다. 조금 무섭지만, 옆에 있는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든다. 진진도 하하도 내일은 조금 더 이기는 하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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