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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어 Aug 24. 2024

사랑의 목격자.

  20대 여자 둘이 같은 공간에 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와 승은 3년 만에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이후로 각자 방이 있었으니 이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는 건 실로 오랜만이다. 같은 집에서 살아도 밥만 같이 먹을 뿐 서로의 중요한 역사는 모두 각자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공부도 방에서, 과제도 방에서, 전화도 방에서, 노래 감상도 방에서, 노래 부르기도 방에서, 슬퍼하기도 방에서, 무엇보다 연애도 각자의 방에서. 하지만 우리의 첫 자취는 당연히 원룸에서 시작되었고 원룸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원룸. 방이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각자랄게 없어진 우리는 식사도 공부도 과제도 전화도 노래 감상도 노래 부르기도 심지어 운동까지도 같이 한다. 가족이란 이름아래 19년 동안 같이 살았으니, 입맛도 비슷하고 노래 취향도 비슷해서 딱히 불편하지는 않다. 새로운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런 우리에게도 생소한 장면이 있으니, 그건 바로 서로의 애인과 전화하는 장면이다.


   누구라도 애인과 전화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건 쉽지 않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애인과 전화할 때만큼은 자리를 피한다. 우리의 오랜 우정을 위해서는 그게 좋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애교 섞인 말투와 한 톤 업된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막상 들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혀가 없어질 정도의 애교는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는 귀여움이 애인 앞에서는 쏟아져 나온다. 그런 모습은 보여주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조금은 곤란한 일이기에 서로를 위해서 피하거나 피해준다.


 그러나 원룸은 피할 수 없다. 피해 봤자 화장실이거나 현관 밖이다. 우리는 그냥 피하지 않기로 한다. 다행히 나도 승도 애인이 있기에 조금은 견딜 만하다.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승이 애인과 전화하는 목소리를 그냥 못 들은 척한다. 하지만 사람이란 자고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안 들어야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승의 목소리가 아주 귀에 콕콕 박힌다. 승은 보통 사람보다 발음이 더 정확하고 목소리가 큰 편이라 더더욱 잘 들린다.


"조군!! (승의 애인의 별명이다. 나와 엄마는 조 군이라고 부른다. 승은 이렇게 부르지 않지만, 실명을 공개할 수 없기에 편의상 조 군이라고 부르겠다) 아니 오늘 친구를 만났는데 걔가 그랬고~ 저랬고~~~"


  조 군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지만 조 군도 말이 많은 게 분명하다. 승보다는 낮고 차분하지만 분명 신난 목소리로 승과 대화를 이어 나간다. 승의 주장으로 조 군은 평소에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나 승의 앞에서는 수다쟁이가 된다고 한다. 그지 사랑은 수다쟁이가 되는 일이지 라고, 생각하며 둘의 대화를 엿듣는다. 엿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거나 맞장구를 치게 되는데 연인들의 대화는 웬만한 개그 프로그램보다 웃기다.


"이번에 언니가 키링 만들러 갔는데 우리도 그거 하자! 내가 손민수 할 거야!"

"손민수? 라라?"

"응? 갑자기 라라랜드가 왜 나와? 재개봉했어?"

"그 유튜브에 엔조이 커플 손민수 말하는 거 아니야? 남자가 손민수고 여자가 라라잖아"


  승은 원룸이 떠나가라 웃는다. 웃는다기보다는 비웃는다. 손민수는 치즈인터트랩 이라는 드라마에 나온 등장인물이고, 주인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라 하고 다니는 인물이라서 무언가를 따라 할 때 "손민수 한다."라는 표현을 쓴다고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그러면서 이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냐며 조 군을 놀린다. 그 모습을 보며 나와 애인을 떠올린다. 나의 애인도 조 군만큼이나 신조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신조어를 잘 모르는 애인을 두고 있는 우리는 애인의 특징도 비슷하고 노래 취향도 비슷하다. 특히 해가 지고 난 후에 듣는 노래는 내 플레이리스트인지 승의 플레이리스트인지 모를 정도로 똑같다. 승은 우리가 천팔백 번 정도 들었고 앞으로 천팔백 번 더 들을 노래라며 최유리의 '툭'을 튼다.


왜 또 그래 난 사랑에 서툴러서

예쁜 말을 하지 못해

너는 핑계를 하나 또 내뱉곤 해

왜 또 그래 난 사랑에 겁이 나서

하려던 말을 삼킨 거야


  나와 승은 간주가 흘러나오자마자 가슴이 웅장해진다며 호들갑을 떨고는 우리가 가진 말 중 가장 예쁜 말을 골라서 조 군과 수혁이에게 편지를 쓴다. (수혁이는 나의 애인 이름이다.) 편지를 쓰게 된 연유는 나는 곧 애인의 생일이고 승은 그냥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 나를 보더니 자기도 편지를 쓰고 싶다며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승의 편지는 편지를 쓰게 된 핑계로 시작한다. 그 핑계로 사랑을 삼키기보다는 드러낸다. 사랑은 언제나 겁나지만 우리는 겁만 내기에는 너무 젊다. 안녕 조군! 언니가 옆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데 나도 너에게 쓰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어. 승은 그 대목을 쓰자마자 나에게 읽어준다. 나는 조 군은 덕분에 안 심심하겠다며 막 웃는다. 노래는 끝나가고 우리는 노래가 끝나가는지도 모른 채로 열심히 편지를 쓴다. 한 장만 쓸 거라던 승의 편지는 어느새 두 장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같은 사랑 노래를 들으며 서로의 애인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다른 사람에 앞에서는 낯간지러워서 하지 못할 말도 한다.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는 밤에는 가끔 이런 일이 벌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애인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일. 대놓고 사랑을 드러내는 일.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노래를 끄고 책상 위의 스탠드 조명을 끄고 각자의 자리에 눕는다. 승이 애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별로 좋지 않은 상상이라고 판단하며 그만둔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목격자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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