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당근마켓 후기 : 안 쓰는 물건 비우기
주변에서 당근 당근 이야기만 듣다가 안쓰는 물건들을 비우기 시작해서 도전해봤다.
(당근 이야기만 들으면 바니바니 당근 당근이 떠오르는 건 정녕 나뿐인걸까..?)
예전에 AI관련 강연을 듣다가 강연자에게 좋은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선물로 받았던 스타워즈 피규어가 있었는데 원래 피규어에는 통 관심이 없던 터라 받아두고 보관만 하고 있었다.
나보다는 더 잘 활용할 피규어 덕후분들이 많을거 같아서 활용도가 훨씬 높을 그분들에게 넘기고 공간도 비우고 약간의 용돈(?)도 벌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피규어에는 전혀 미련이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스타워즈 피규어는 '반다이 스타워즈 피규어 BB-8&R2-D2' 미개봉 상품이었다.
피규어를 판매해본 경험이 없다보니 가격 책정 자체가 힘들어서 일단 이 상품이 얼마나 하는지 시세를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으로 나온 피규어들은 해외 배송 혹은 국내 배송이었고 가격도 저마다 천차 만별이었다. 미개봉 상품이긴 했지만 현재 판매하는 가격으로 올릴 수는 없으니 고민이 되었다.
4만대가 최저가였고 해외 배송을 하는 경우에는 배송비가 꽤 비싸 8만원 대도 있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시세 판매 가격의 절반 정도의 가격인 25,000원으로 하는 것이 거래도 빠르고 적당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결심을 했으니 행동은 빠르게! 바로 거래 상품을 올리자 한시간 내로 알림 문자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 온 채팅은 상품에 대한 정보에 대한 문의였고, 두번째는 아직 구입 가능하냐는 문의였다.
첫 채팅은 피규어의 크기에 대한 문의였는데 미개봉 상품이라 크기를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워서 동일 상품을 판매하고 있는 사이트 주소를 주면서 이 사이트를 참고하라고 답변했다.
두번째 채팅은 구입이 아직 가능하냐고 물어 아직 구매 가능하다고 이야기 했는데 30분 가량 답이 없었다.
세번째 채팅이 왔다. 구매희망자는 바로 구입하겠다고 어디서 만나면 되냐고 물어보았다.
일단 두번째 구매 희망자의 답변을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기다려봐도 첫 문의 이후 답변이 없었다.
구입 가능하다는 답변, 구입 희망자가 있어서 빠른 회신 달라는 메시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 다른 구매 희망자에게 판매하겠다고, 다음 기회에 뵙자고 하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채팅은 끝을 맺었다.
또다른 구매자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판매 상품을 거래중으로 변경해두었다.
구매 희망자와는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 만날까 했는데 구매자가 아이 하원시간이 걸려서 4시 정도에 만나길 희망했고, 나도 특별한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다.
만날 약속을 정해두니 속이 시원하면서 어떤 사람이 나올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지인에게 당근 마켓 거래할 때 현장에서 할인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구매자들이 더러 있다는 후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이상한 사람이 나오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일단 피규어 상품을 담을 쇼핑백을 찾았다. 이왕이면 좋은 판매자로 기억되고 싶었다.
지난 번에 선물을 받을 때 선물용 빨간색 쇼핑백이 있었던 게 기억이 났고, 피규어를 조심스레 담았다.
잘 쓰시길 바란다고 구매자를 위한 작은 메세지도 포스트잇에 적었다. 물건 거래만 하면 되지만 뭔가 달달한 정도 나누고 싶어서 평소에 맛있게 먹었던 리터스 초콜렛도 몇개 담았다. 이정도면 맘에 들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와 오니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먼저 나가 있어야 하나, 아니면 약속 시간에 딱맞게 도착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래도 첫 거래인데 늦고 싶지는 않아서 서둘러서 10분 정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밖에 나오니 너무 춥다. 몇 분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우리 동 1층 실내에 있다가 5분 전에 나가기로 했다.
5분이 되기 전에 구매자에게 연락이 왔다. 차를 타고 오는데 시간에 맞춰 도착을 못할 거 같다고 15분정도 늦을 거 같다는 연락이었다. 10분이나 먼저 나가서 계속 서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1층에서 멍하니 10분간 할 것이 없기도 해서 다시 화장실이나 다녀오자 하고 집으로 올라갔다.
이번엔 약속된 시간이 되기 5분 전에 맞춰서 집을 나섰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정문으로 걸어가서 누구일지 모를 구매자를 기다렸다. 혹시 누군지 헤맬수도 있으니 나의 정확한 위치와 분홍 털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도 채팅으로 알렸다. 다가오는 모든 발걸음이 당근 구매자로 들렸다.
드디어 구매자로 촉이 오는 차량이 정문 앞쪽에 멈췄다. 직감적으로 '이건 당근이다!' 느낌이 왔다.
역시나 차량에서 누군가가 내렸고, 인상이 좋으신 여자분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당근....보***님 맞으신가요?"
"안녕하세요. 아하하, 네네. 맞아요."
"미개봉이긴 하지만 상품 한번 확인해보세요."
"네네, 맞네요. 여기 현금 드려요."
"(아직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제가 금액 확인만 할께요. 잠시만요!
(정확히 25,000원이 들어있었다) 금액 맞네요.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짧은 대화가 오갔고, 내 손에는 방 어딘가를 차지하던 쓰지 않던 피규어 대신 25,000원 봉투가 남았다.
손에 들린 봉투를 보니 뭔가 뿌듯했다. 집도 비우고 돈도 번 느낌이랄까. 기분이 좋았다.
현금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담아서 전달해 주니 뭔가 새해 용돈을 받는 기분도 들었다.
거래가 끝나고 거래중인 상품을 거래 완료로 즉시 변경하고 구매자에 대한 거래에 대한 후기도 남겼다.
매너가 좋다는 말과 함께 봉투에 담아서 주니 용돈 받는 거 같고 좋았다고 짧은 글을 남겼다.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거래해서 좋았고, 채팅 내내 매너가 좋았다.
그러자 얼마 뒤 구매자의 따뜻한 후기도 도착했다. 내가 담았던 빨간 쇼핑백이 좋았나보다. 다행이다.
쇼핑 봉투도 맘에 들고 덕담 메시지와 초콜렛에 대한 칭찬을 해주니 괜히 더 기분이 좋았다.
약속 시간 변경으로 밖에서 기다린 시간이 좀 있어서 미리 미리 이야기 해줌 좋을텐데 라고 약간 아쉬웠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하니 괜히 내가 기다렸던 시간도 보상받은 느낌이 들었다. 희안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 건강도 기원하고 또 만나고 싶다고 하니 동네 친구가 생긴거 같기도 했다.
난 참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기분이 좋아지나 보다.
당근 마켓에는 매너 온도라는 것이 존재한다.
최초에는 36.5도로 사람의 체온으로 기본 온도가 결정되지만 좋은 거래를 자주 하고 구매자가 좋아하는 좋은 판매자가 되면 그 온도가 높아진다. 오늘의 거래로 나의 당근 거래 온도가 조금은 따뜻해졌다.
나눔을 많이 하고 자신이 가진 좋은 물건을 필요한 구매자에게 좋은 매너로 판매하면 더 올라간다고 한다.
거래가 끝난 후 여러가지의 활동 배지도 받았다.
첫 거래에 대한 신뢰의 시작, 따뜻함의 시작, 새로운 이웃, 첫거래의 구매자의 후기로 인한 첫 후기의 설렘과 친절한 판매자, 하트의 비밀, 시간은 금 배지를 받게 되었다.
내가 가진 소용 없는 물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은 참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근 마켓의 성장은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로 가는 여정의 성장이다.
이번 첫 시작을 계기로 앞으로도 당근마켓을 자주 이용하게 될 것 같다.
나의 공간을 더 비우기 위해서, 나보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건을 나누기 위해서,
물건에 대한 집착과 나의 욕심을 덜기 위해서 오늘도 누군가는 당근을 이용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22년 새해, 공간을 비우기 위한 당신과 나의 성공적인 당근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