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참 예민한 주제다.
JTBC에서 이뤄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가 우리나라 미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마 최근 몇 년간 '여성 혐오'의 행태는 사실 여성 위치가 신장됨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나타 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성 혐오'의 핵심 원인은 바로 전통적인 남성 사회 중심의 균열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남성이 여성을 만나는 기회가 능력 부족으로 박탈되거나 힘들어졌기 때문이며 또는 남성의 전통적 가치관의 관점으로 여성이 더 이상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남성은 그런 여성들을 '김치녀, '된장녀'라고 지칭해서 여성의 가치를 깎아버리고 본인의 생각에 정당성을 얻거나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그런 문화는 어디든 존재한다. 본인이 이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 하거나 다른 남자에게 가버린 여자들을 외국은 'Whore; 창녀'라고 하고 우리나라는 '걸레'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로 남성에게는 이런 말이 붙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사회적 권력관계에 있어 아래에 있기 때문에 성립되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이 된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가 대략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평등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나? 지금 고시 합격자를 보면 여성이 더 많고.. 여성 ROTC 장교가 남성을 지휘하는 세상이다'
무심코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아예 보고 있지 못하고 본인의 주장에 유리한 내용만 가져다 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남성이 정말 여성과 동등한 입장이라면 지금의 '미투' 현상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남성은 지금의 여성도 군대를 가야 한다고 말하며 이 또한 성차별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이 주장은 어떤 문제가 있는가? 우린 이런 선택이 어떤 배경과 맥락에 의해서 이뤄졌는지 이해를 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남성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가문과 가정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권력을 항상 쥐고 있었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농경사회 훨씬 이전의 수렵채집 기간을 보아도 남성이 사냥과 전쟁에서의 싸움을 앞도적으로 도맡았다. 실제로 20세기에 발견된 전통적 삶을 살고 있는 파푸아 뉴기니 또는 아마존 정글에서의 부족들을 보아도 사냥과 전쟁은 거의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여러 학자들의 주장이 있지만 어느 시대든 또는 어느 지역이든 남성이 사회적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제일 설득력 있는 주장은 여성만이 '임신과 출산'을 하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인 것이다. 여성은 자기 몸안에 있는 아이를 낳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만이 모유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아이와 절대 떨어질 수 없다. 여타 포유류와 달리 인간 아이는 막대한 시간과 정성이 들어간다. 왜냐하면 인간의 아이는 수개월이 지나도 걷지도 못해 스스로 음식을 얻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장 자체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상당히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전통적인 부족 생활 또는 농경시대를 포함해 인간 자체가 노동력의 투입 단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많이 낳았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여성은 끊임없이 임신과 육아에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남성은 여성과 자식을 지키기 위해 사냥과 싸움을 하며 육체적 힘을 키울 수밖에 없었고 더 나아가 사회적 권력과 관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남성의 생존이 즉 가족과 부족의 생사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군대를 왜 가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는 건. 남성 본인이 스스로 결정해 놓은 사실을 망각 한채 외치는 모순적 상황이다. 여성이 스스로 군대를 안 간다고 결정한 사실이 우리나라 역사에 존재하는가? 당시 남성 스스로 여성을 약자로 규정해 놓고 병역의무를 없앴기 때문이다. 많은 남성들이 역차별이라고 느끼는 행위나 제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을 하나의 남성 소유물 또는 열등한 존재로 규정해 놓은 시각 하에 이뤄진 결정들이 이 이후에 본인에게 되돌아온 불편함이다.
남성에 의해 불평등한 환경을 만들어 놓은 배경은 무시하고 표면적인 현상을 보고 불평하는 상황은 비단 군대 문제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의 경력 단절은 여성이 업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에게 지워지는 막중한 육아와 출산 책임에 있다. 또한 남성이 결혼할 때 집을 구해와야 한다는 가, 남성이 데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불편함도 오랜 기간 동안 경제적 능력을 남성이 맡아야 한다는 사회적 믿음에서 기반한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편익을 취하기 위해 기존의 남성 우월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다른 논지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잇지 않겠다. 하지만 여성들 조차 이런 주장들이 사실은 남성 중심적 세계관에서 이뤄졌다는 걸 인지 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남성에게 '역시 남성은 가사에 관심이 없고 무능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여성 전용 쉼터'
'여성 전용 주차장'
'지하철 여성 전용칸'
'여성 전용 호스텔' 등
위에 나열한 여성에게만 주워지는 특권이 어떤 남성들에게는 불평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또한 많은 여성은 이런 정책들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정책들이 옳다 틀리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 저변의 생각 그 핵심은 대부분 여성이 실제로 남성 우위의 위계질서 하에 노출되어 있으며 여성이 남성보다 약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는 믿음도 같이 깔려있다. 여성이 고대시대부터 지금까지 남성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돈과 권력에 있어 여성은 항상 남성보다 뒷전이었다. 큰 조직에서 남성이 거의 항상 유리한 승진뿐 아니라 같은 경력과 직급이어도 남녀 임금 차이가 존재한다는 건 사실상 명확한 증거이다. 소수지만 여성이 남성보다 앞섰던 적도 있지만 그 여성은 기울어진 운동장 안에서 운이 아주 좋다던 거 아니면 남성보다 뼈를 깎는 노력의 곱절을 필요로 했다.
다시 정리하면 지금 남성이 역차별이라고 느끼는 여러 가지 사안은 대부분 남성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선행되었거나 내려져 왔던 산물들이다. 이점에 대해 지금 남성이 느끼는 불평함을 토로하는 건 잘 못된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남녀 균형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르는 충돌이라고 보는 게 가깝다. 분명한 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으로 남성보다 더 한 사회적 압박과 편견에 시달렸으며 여성이 단 한 번도 남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며칠 전 케리 페리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아직 첫 키스도 못 한 남성에게 장난으로 입맞춤을 해버렸다. 그저 재미있는 일화 일 수 있지만.. 만약 그 반대로 남성이 어린 여성에게 입맞춤을 했다간 성추행 장면을 공중파로 보여준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가 장애인을 개그의 대상으로 삼지 않듯이 우리의 도덕적 믿음에는 약자가 강자를 향해 무언가 표출하는 행위는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고 강자가 약자를 향하는 건 아무리 자연스럽다고 해도 부당함을 느끼기 쉽다. 힘과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근데 케리 페리의 경우는 남과 여라고 하더라도 케리 페리는 세계적인 셀레브리티이고 권력이 그 일반 남성보다 높다. 하지만 여성이다. 그리고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남성은 여성이 키스를 해주는 것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권력의 높고 낮음이 뚜렷하게 나눠져 있지 않고 섞여 있다. 우리는 그럼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여성이 가슴이 파이고 치마가 짧은 옷을 입어서 남성이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실인가 아닌가? 아직도 우리나라 문화에선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성추행, 성폭행 등의 원인을 여성들에게 돌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강하게 이 점에 대해서는 인식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가해자가 엄연히 잘 못 한 점을 가지고 피해자를 나무라는 것인가? 이 또한 남성이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소유물 여기거나 남성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남성주의적 사고의 산유물이라고 생각한다. 옷으로 거의 온몸을 가리고 다니는 '히잡' 문화를 가지고 있는 어느 중동 국가에서는 성추행 및 성폭력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 돌려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여성이 가슴이 파이고 치마가 짧은 옷을 거리에서 입고 다녀도 어떤 남성도 성적 충동을 느끼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이건 옳은 주장인가 아닌가? 성적 충동은 남성에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 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 다시 돌아와 '여성이 거리에서 가슴이 파이고 짧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성추행 또는 성폭력의 원인 제공이 아예 될 수 없는가'라고 주장하는 건 과연 옳은 의견일까? 만약 틀렸다고 하면 남녀 간 책임에 자로 재듯 나눌 수 있을까?
왜 여성은 상체를 내놓고 다니면 안 되는가?
왜 여성은 화장을 하고 다녀야 하는가?
왜 남성부는 없고 여성가족부가 과연 필요한가?
등등
남성의 전통적 시각에서 발생한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이 것을 딱 부러지게 잘 못되었다는 증명을 하거나 그 근거를 대기가 쉽지 않다. 이것 또한 여러 가치관이 혼재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성평등, 성차별을 위해 그저 똑같이 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여 그렇게 진행을 하다 보면 우린 또 다른 문제에 부닺치게 될 것이다.
여성이 약자니 당연히 남성이 역차별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니 어떤 특별한 장치나 제도가 뒷받침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차별을 역차별로 균형을 맞춘다는 논지는 일차원적의 접근 일 뿐 궁극적인 남녀평등에 개선하는 바는 없다. 차별은 또 다른 차별을 낳고 이 차별은 또 다른 특권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 한자로 나뉘게 될 뿐이다.
우리가 그리는 완벽한 양성평등이란 개념은 세상이 마치 부패 하나 없고 깨끗한 곳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은 허황된 이야기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점진적 사회 진보의 결과물임은 확실하다. 흑인 노예 시절과 비교해 지금의 흑인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나아졌으며 현대 사회에 있어 대부분 선진국의 여성은 남성과 많은 부분에서 동등한 권리와 인권을 누린다. 하지만 서양사를 보아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졌던 시기가 불과 100여 년 정도도 안된 다는 걸 고려하면 지금의 진보 속도는 정말 빠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미투가 지금처럼 폭풍같이 터지고 있는 이유는 기성세대들과 젊은 세대들 간의 갭도 한 몫하고 있다. 지금 터지고 있는 가해자들 대부분이 50대 이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인 반면 피해자 여성의 대부분은 20~30대 젊은 이들이다. 이 여성들은 80년대 이후 민주주의 세대로서 교육적, 문화적 소양이 무척 높은 층이다. 그들에게 이런 부조리함은 더더욱 참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치 환경의 변화를 뽑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이전 지난 9년간의 보수 정권에서 사회적 약자는 정말 숨 죽이며 살았어야 했다. 온갖 가진 자와 특권층이 억누르는 시대였고 그렇기에 약자가 아무리 발버둥을 처도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오히려 입막음을 했던 부패가 쌓여갔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평등의식과 민주적 의식은 계속 쌓여 갔고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 이런 악습들이 터져 나왔을 때 드디어 남들이 들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회로 변화되었다고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미투가 활발하게 되고 썩은 부분이 더 도려내게 되었을 때 우린 어떤 긍정적 믿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여성에게 있어 내가 피해를 받았을 때 더 이상 나의 잘못이라 자책하지 않고 내가 누군가에게 이야기했을 때 주위나 사회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남성에게 있어서는 내가 과거했었던 행위가 옳은 행동이 더 이상은 아니며 만약 저지르게 되더라도 처벌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면 남성 스스로에게도 예방 효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변화는 이런 물질적 변화와 더불어 우리의 믿음과 가치의 변화가 같이 올 때 이뤄진다. 미투의 미래란 남녀가 결국 적대하는 미래가 아니다. 여성이 곧 내 아내이자 여자 친구이며 내 딸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삶은 남성도 행복하게 되리라는 믿음이 생기는 사회이다.
지금의 미투는 여성만을 위한 삶의 투쟁이 아니다. 여성은 미투를 하고 남성은 더욱 위드유로 응원해야 한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