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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ex의 국제뉴스 Apr 11. 2018

경쟁주의 사회의 대가

위너(Winner)와 루저(Loser)의 사회    


자본주의가 도입된 후 농업사회에서 산업화될수록 인간은 점점 더 개인화가 이루어졌다. 농업사회에선 가족 단위나 마을 규모의 노동력이 같은 시간대에 동시에 중요했기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협업, 협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취업 개념은 개인의 선택에서 이루어지고 소득도 혼자 갖는다. 대가족이 점점 필요 없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축척된 지식이 인터넷, 책등으로 대체되고 노동력을 잃은 노인의 지위는 더 이상 대접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산업화는 도시를 만들고 필시 개인화를 가속화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는 이 전에 없던 사회적 현상을 얻게 된다.    


바로 '경쟁주의'이다.    


성공을 사회가 어떻게 정의하든, 그 반대로 현대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 한자 우리는 '루저'라는 딱지를 붙인다. 가정이지만, 중세 시절 계급이 명확하게 나뉘었던 시절의 하급 계층들은 우리가 지금 말하는 실패자 또는 루저보다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옛 시절 사람들은 현세의 빈곤, 질병, 불평등, 불합리 등의 고통은 신이 주신 운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가지고 있는 것에서 최대한 만족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왕과 귀족이 아닌 건 운명과도 같이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농부나 하급 계층의 사람들을 Unfortunate(불운한, 애처로운)이라고 여겼다.    


지금의 루저(Loser)는 그렇지 않다. 키가 180cm 되지 않은 패배자에 사회적 낙오자다. 불평등한, 정의롭지 않은 사회적 상황과 시스템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들의 실패는 개인의 무능력으론 인한 여겨진다.    


우리는 '경쟁주의 사회'의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다.    

  


경쟁주의의 대가  


이런 자본주의와 산업화를 비슷하게 겪는 나라들은 어느 정도 심한 경쟁 주의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반공과 함께 성장주의의 폭주 기관에 온 국민이 뛰어들었던 70~80년대 이후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경쟁 주의가 스며들게 되었다. 경제 성장이란 미명 하에 돈과 효율성은 제일의 가치였고 인권, 자연보호, 노동환경, 문화, 역사인식, 건강, 행복한 삶 등에 대한 가치들은 그 뒷전이 되었다.   


범죄의 대가로 10억 받는 다면에 대해, 50%가 넘는 고등학생이 1년간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10살에 불과한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스케줄은 성인 못지않다. 학교에, 학원에, 과외까지…. 숙제까지 하다 보면 밤 12시가 훌쩍 넘어가는 것도 빈번하다. (부모님의 DNA가 그대로 들어갔을 터인데... 본인 어렸을 적 학업 성적 및 성취력은 잊어버렸는지.. 자식에게는 sky 대학 입학에 인생을 건다)  물론 교육열이 높고 개인 성적 향상이 좋은 점이라는 걸 부인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아이는 용광로 같은 레이스에 뛰어들게 되고 사회적 인간관계 형성의 기본을 경쟁적 관계로 이해하게 된다. 나는 이 경쟁적 이해관계가 파생하는 사회적 단점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한다.    


첫째, 사람과 이웃을 존중, 배려의 대상이 아닌 비교와 생존의 관계로 인식된다.  
둘째, 인간은 누구나 관심받고 이해해주길 바라며 사랑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경쟁 주의로 인해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비교당하는 것에 익숙해 지기 때문에 내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 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셋째, 인간의 이런 이기심은 돈과 권력의 욕망을 점점 더 부추겨, 사회적 공동체의 끈을 연약하게 만들고 때론 공정한 시스템을 무너트린다. 우린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넷째, 이런 한국 사회의 정글에서 도태된 사람은 심한 박탈감을 느낀고 낮은 자존감과으로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비관으로 인해 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폭력과 범죄를 일으킨다.      


갑질이란?


지난 몇 년간 '갑질' 문화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계급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만의 문화가 아닌 우리 주변과 이웃과의 삶 속에도 침투해 있다. 갑질 문화에 유독 민감한 게 좋게 해석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평등의식이 너무 높아서라고 할 수 도 있지만, 이런 배경의 본질은 '내가 너보다 잘 났다'라는 걸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경쟁주의 사회에서 파생된 부산물이다.  

  

우리나라가 여타 다른 나라보다 물질주의 가치관이 유달리 센 이유도 경쟁주의 심리가 더욱더 부채질한다. 내가 명품과 고급차를 타고 다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깔려있는 게 기본이지만 유달리 우리나라가 물질주의 가치관이 무척 센 이유는 내가 명품차와 고급차로 인해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우월감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부족한 자존감을 명품과 고급차 같은 돈과 허영심으로 끊임없이 채운다. 성장주의와 물질주의의 욕망은 너무나 강력하다.


 

나는 내 집 주변에 푸른 나무와 깨끗한 천이 흐르고 적당한 크기의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콘크리트 아파트 뿐이다. 건설사와 주민들 조차 돈 되는 아파트가 들어오길 원한다

경쟁주의 피해는 사회 안전까지 영향을 준다.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과 도로 위에서는 분노 표출의 장이 되고 사회적 약자와 은둔형 외톨이들은 박탈감, 비관, 분노감으로 본인보다 더 약자인 여성과 노인에게 무차별 폭행을 일삼는다. 일명 '묻지 마 폭행'이다. 이 기저에 깔려있는 심리도 비슷한 경향을 띤다. 그들은 대체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와 사람들이 나를 무시했고 멸시했다' 그들은 본인의 잘 못을 되돌아보긴커녕 범죄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경쟁주의가 가장 무서운 이유는 인간을 동등한 대상이 아닌 순위를 매길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식 변화가 사회 변화를 이끄는가? 사회 변화가 인식 변화를 이끄는가?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어떤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출근 시간의 만원이 된 서울 지하철 모습을 보여주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삶에 익숙해…. 어딜 가든 사람이 많거든…' 나는 이게 핵심 이유라고 생각한다. 좁은 땅, 없는 자원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아이슬란드는 우리나라보다 땅덩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구는 30만 명 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 자체가 귀중하다. 정부는 사람 자체가 귀중한 자원이기에 인간 중심의 노동환경과 복지에 많이 투자한다. 사람들은 커뮤니티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문화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 여기서는 어떤 제도도 사람의 행복보다 앞서는 건 없다. 

 

풍요와 안정을 가질 수 있다는 건 본질적으로 환경이 가능해야 하는 것 같다. 나는 중국 같은 곳은 절대로 이런 아이슬란드 같은 분위기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이나 한국은 공공의 자원과 풍요를 누리기에 사람들이 너무나 밀집되어 살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 절벽에 마주치고 세대가 지나면 북유럽처럼 우린 인간 자체를 점점 더 귀중하게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경쟁적 교육에서 탈피해 개인의 존엄과 창의성을 존중해 줄지 모른다.    


저성장 주의, 청소년들의 취업난, 저출산 및 인구절벽 그리고 수많은 경쟁주의 사회로 인한 인간 가치의 훼손.. 우리가 사회를 생각하며 자신을 희생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개인의 이기적 선택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선에서 최대한 행복을 추구하는 거 정도가 그나마 현실적 대안인가.. 친절한 사회를 갖는 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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