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소설] 미진이는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관찰 노트 1화 ( 존재는 실패속에서 남아 있었다.)

by 민이


미진이는 터벅터벅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영하 13도, 매서운 겨울밤이었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계는 오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깜깜한 밤길을 혼자 걷고 있는데, 오른쪽 골목 모퉁이에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붉은 눈으로 미진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학창 시절에 들었던 고양이 유령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라, 미진이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미진이는 혼자 산 지 3년 차다. 가족과 함께 살다가 독립을 선언했다.

영어 강사로 일한 지는 23년째, 지금은 자신의 브랜드로 학원을 운영하며 센터장을 맡고 있다.

어릴 적부터 관심사가 많았던 미진이는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직업을 돌고 돌아 결국 지금의 자리, 영어 강사에 이르렀다.

카페, 편의점, 공장, 법률 리서치 보조까지.

직업적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다.

미진이는 스스로 판단력과 사고력이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법을 공부해 보고 싶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변호사를 꿈꾸기도 했다. 헌법, 민법, 형법 개론서를 읽어야 한다는 말에 판례·법령 검색 보조 일까지 해봤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질문이 남아 있었다.

이 직업이 과연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눈에 보이는 결과나 돈보다, 내면의 성숙과 삶의 의미, 나 자신의 가치를 돌아보게 하는 일. 영성을 흔드는 직업을 원했던 미진이는 결국 직진하던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우회했다.

지금의 영어 강사는 미진이에게 보람을 주는 직업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혜롭고 인자했던 영어 선생님을 무척 존경했는데, 그 영향이 컸다. 교육자의 삶은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던,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었다.

학생들에게 배움과 지식을 전하는 일.

열심히 쌓은 지식을 재구성해 자신만의 언어로 전달하고, 누군가의 삶에 작은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

그 영향력은 생각할수록 매력적이었다.

이 일은 미진이의 가치관과 잘 맞는, 보람 있는 일이었다.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

미진이는 책에서 이 문장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람은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설계도를 들고 태어나지 않는다.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 선택과 행동, 경험을 통해

나만의 본질—의미와 정체성, 직업적 이름—이 만들어진다.

이 문장은 미진이가 진로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확신을 주었다.


미진이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23년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교육자로서의 길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다 처음 영어 강사에 도전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여러 학원에 지원했고, 프랜차이즈로 유명한 정철어학원에서 시강 요청을 받았다.

단단히 준비하고 학원 문을 열었다.

원장님을 보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의 첫인상은 또렷했고, 다소 딱딱해 보였다.

혹시 너무 깐깐하신 건 아닐까.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미진이는 애써 당당한 척했다.

사실 수학은 좋아했지만 영어는 싫어하던 과목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갑자기 진로를 바꾼 터라, 영어 공부를 위해 서울의 고시원을 전전했다. 결국 캘리포니아 테솔 자격증을 수료했다. 열정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시강을 앞두고 걱정이 밀려왔다.

실수하면 어쩌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원장님과 세 명의 강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분필을 들고 시강이 시작됐다.


8품사, 문장 형식, 시제, 수일치, 수동태까지. 문법의 큰 흐름을 숲처럼 연결해 설명하고, 수능 모의고사 지문 풀이로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여기서 내가 버벅거리면 어쩌지?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정말로—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가…”

시강을 듣던 원장님과 강사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어그러졌다.

결국, 첫 번째 시강은 쓰디쓴 실패로 끝났다.


그 후,

과연 강사로서의 길이 맞는 걸까.

이 길이라고 확신했던 자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진이의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완벽하지 않았던 그 순간까지 포함해서,

그날의 미진이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지나오며

자신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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