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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호 Feb 12. 2016

영웅의 몰락

인류의 타락은 어쩌면 죄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 빠져버렸다는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 범법행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가?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판단을 검사라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옳은 것인가? 소위 영웅이라는 사람은 법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람들이다.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앉자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자신의 곡명을 ‘보나파르트’에서 ‘영웅’이라 변경했다. 영웅이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용납되지만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면 죄를 짓는 일이다. 사람들은 영웅에게 관대하다. 영웅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옳다. 


<죄와 벌>에서 등장하는 라스콜리코프는 자신이 스스로 영웅이 되려고 했다. 영웅은 인류를 위하여 무슨 행위든지 할 수 있다는 이론을 그는 내세웠다. 그 권한에는 어떠한 행위도 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 살인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법으로도 그를 가둘 수 없으며 오히려 법을 파괴하는 자다. 그는 복종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라스콜리코프는 자신의 이론을 따라 죽어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배불리는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도끼로 살인하기에 이른다. 


그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살인은 성공했지만 마음의 양심은 그를 흔들었다. 자신이 흔들릴때마다 견고히 붙잡는 것은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스스로 살인이 죄라고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피를 빨아먹는 이만도 못한 노인을 죽인 것이 오히려 마흔 가지 죄를 용서받아 마땅하다고 자랑할 정도다. 다만 나중에 자수를 하게 되는데 그가 그렇게 결심한 이유는 자신이 비굴하고 무능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살인과 그에 따른 결과까지 성공했다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테지만 실패하여 우열해 보인다고 여겼던 것이다. 자신의 실패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여전히 그는 실패를 이해하지 못한다며 자신의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구나. 수많은 인간을 폭탄이나 정규적인 포위 공격으로 살육하는 것이 어째서 더 존경할 만한 형식이란 말이냐?” 작가는 그의 입술을 빌려 영웅론의 허상을 꼬집는다. 라스콜리코프의 실패는 형식의 문제였던가?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성공한 영웅에게 맡긴다. 윤리와 도덕은 성공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는 ‘죄’를 소냐라는 창녀에게서 라스콜리코프는 발견한다. 술주정뱅이 아버지(아버지는 술에 취해 사고로 죽는다.)와 폐병 환자인 계모 그리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팔 수 밖에 없었던 그녀의 아픔을 라스콜니코프는 깊이 느낀다. 그녀에게서 위대한 고통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위대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무 보람 없이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제 몸을 팔았기 때문이오. 이처럼 무서운 일이 어디 있겠소!” 이런 소냐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겉보기엔 신앙이 없어보이는 창녀에게 작가는 신앙을 불어넣는다. 그녀에게 “죄라는 관념”은 오히려 그녀의 투신자살을 만류시켜온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책임지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더럽고 부끄러운 처지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사람들 때문에 단숨에 죽어버리는 결심을 거두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해주십니다!” 그녀의 고백이다. 


라스콜리코프의 죄는 소냐에게서 고발된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했다. 영웅이라고 자신을 여겼던 것은 절대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없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벌이다.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린 것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다른 점은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 되어 스스로 구원의 길을 걸어가려고 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몸을 파는 창녀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했다. 진정한 희망은 자기 사상의 허상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마지막엔 형무소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라스콜리코프에 대하여 작가는 희망의 단서를 이렇게 제공해준다.  


"그는 이미 강가에 서 있을 때 자기 자신 속에, 그리고 자기의 신념 속에 깊은 허위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 그 예감이야말로 그의 생애에 있어서의 미래의 전환, 미래의 부활, 미래의 새로운 인생관의 전조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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