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닿을 수 없는 차이
지난번에 어머니가 다녀가셨다. 갑자기 생긴 백반증때문에 염려스러우셨던 것이다. 그동안 모으셨다는 적금을 깨고 두툼한 돈 봉투를 손에 쥐어 주시면서 꼭 치료를 받으라고 당부를 하셨다. 더불어 목회자는 안해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권면도 잊지 않으셨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아버지와 이틀을 묵으셨는데 그때 안해의 나에 대한 염려스러운 말을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리셨던 것이다. 안해는 내 건강이 걱정되어 말했는데 난 그런 걱정이 싫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인데 왜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꼭 사춘기 소년이 된 듯한 그 느낌은 마치 목구멍에 사래가 걸린 듯 했다.
<사랑하는 안드레아>는 엄마 룽잉타이와 아들 안드레아 사이에 오가던 편지를 엮은 책이다. 2004년 5월 12일 엄마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으로 2007년 8월 25일 안드레아의 답장으로 삼년동안 오간 서른여섯 편의 편지가 실려 있다. 룽잉타이는 대만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녀가 1985년에 지은 <야화집>은 대만의 민주화를 이끌었다. 그녀의 글은 민주화의 불을 당겼지만 신변의 위협으로 1986년 독일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 남편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의 이름이 안드레아다. 엄마는 대만에서 4년 동안 타이베이시의 문화국장으로 일을 하게 되어 유럽에 있는 아들들과 잠시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만난 아들은 열여덟 살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열여덟 살 사람을 이해하려고 편지는 시작되었다.
엄마는 줄곧 '사랑하는'이라는 형용사를 아들에게 붙여 편지를 시작할 때 ‘사랑하는’ 안드레아로 글을 시작한다. 반면 아들은 그저 엄마라는 호칭으로 편지를 시작할 뿐이다. 어쩌면 룽잉타이가 말했던 것처럼 부모라는 존재는 '낡은 집'의 처지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아들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낡은 집같은 존재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사는 그 집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온기와 편의를 제공하지만 집은 집일 뿐이야. 집과 소통하고, 집에게 말을 걸고, 다정하게 굴거나 집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잖아. 가구를 옮기다 부딪혀 벽 한쪽을 망가뜨려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지. 부모란 말이야, 건넛산 돌 쳐다보듯 하는, 익숙해져버린 낡은 집 같아." 그녀의 '낡은 집'이라는 표현이 어찌나 와 닿던지. 그 여운이 가슴을 오랫동안 공명했다. 나의 부모님은 이미 낡았고 나는 점점 낡아져간다.
나에겐 이 책이 아들의 입장에서 읽혔다. 아직 내 아이들은 아홉 살, 일곱 살이니 열여덟 살의 다른 사람은 실감이 가질 않는다. 요즘 첫째 딸내미가 독감 때문인지 까칠해졌지만 유효기간은 짧을 것이다. 가닿지 않는 다르기 만한 세대차를 이 책을 통해 더욱 발견하게 된다.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어떤 소통은 이루어지지만 엄마의 바램과 아들의 저항은 불꽃을 일으키며 마찰이 일어난다. 엄마와 아들 각각의 마지막 편지는 둘 사이의 존재적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어쩌면 그동안의 편지왕래가 서로의 거리를 좁혀주었을 법한데 그러지 못하고 끝을 맺는다. 엄마는 서운하고 아들은 어른이고 싶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확인해보시길.
그렇다. 두 세대의 다름은 다른 것이다. 그저 다른 것이구나 정도에서 이해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서로 섞여 하나가 되지 못한다. 엄마는 엄마고 아들은 아들인 것이다. 나의 엄마도 그렇다. 아무리 명망 있는 사회비평가며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라 하더라도 아들에겐 걱정 많은 평범한 엄마인 룽잉타이처럼. 지식인은 좀 다를 것이라는 편견을 깰 수 있었고 내가 이해 못하는 엄마의 모습은 어느 엄마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내게만 유독 유별났던 것이 아니다. 이번 설날엔 편지를 읽어드릴까 한다.